지난 금요일 회사에 연차를 냈다. 아주 중요한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행사를 참여하기 위해선 선착순으로 지원해야만 했는데, 다행히 내가 선정되었다. 바로 어린이집에 '아빠 산타'로 크리스마스 행사를 참여하는 것이었다. 전체 원아 중에 딱 3명의 아빠만 이 행사에 직접 참여할 수 있었다. 4살이 된 우리 딸은 며칠 전부터 어린이집 크리스마스 행사를 고대하고 있었다. 아이는 이제 크리스마스가 뭔지, 산타할아버지가 뭐 하는 사람인지 대략 알고 있다. 나는 아이에게 행사가 열리는 날까지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했다.
"똥이야, 좀 있으면 어린이집에 산타할아버지가 놀러 오신대!"
"와~,그럼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주겠다!"
아이에게 산타할아버지는 그냥 선물 주는 자선 사업가 정도로 인식되어 있었다.
"똥이가 착한 일 많이 했으면 선물 주시고, 엄마, 아빠 말 잘 안 들었으면 선물 안 주실걸?"
"엄마랑 아빠 말 잘 들었잖아, 난."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전형적인 크리스마스 대화들로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특별한 산타할아버지를 만나는 날을 기대할 수 있도록 했다. 나 또한 무척이나 기대되는 날이 될 것이었다.
고대하던 어린이집 크리스마스 행사가 열리는 날. 나는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를 서둘러 깨웠다.
"똥이야, 오늘 어린이집에 산타할아버지 오신대."
평소였으면 뒤척이며 뜸 들이다 겨우 겨우 눈 뜰 아이였지만, 오늘만큼은 번쩍 눈을 떠서는 벌떡 일어났다. 오늘은 내가 아빠 산타 행사로 연차를 낸 만큼 등원부터 하원까지 도맡아 할 예정이었다. 9시 반까지 등원해 달라는 어린이집 요청에 따라 빠르게 준비했다. 다행히 아이가 잘 따라주었다. 아침도 잘 먹었고,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준비한 빨간색 원피스도 잘 입었다. 시간에 맞춰 아이를 무사히 어린이집에 들여보낸 뒤, 어린이집을 크게 한 바퀴 돌고는 나도 어린이집 안으로 아이 몰래 들어갔다.
원장실에서 아빠 셋이 모두 모였을 때 원장님께서는 지하 강당 구석 숨겨진 방으로 우리를 안내해 주셨다. 그곳에는 산타 복장 세 벌이 놓여 있었고, 우리 아빠 셋은 자연스레 주섬 주섬 산타 옷을 입기 시작했다. 한 아빠가 옷을 입으며 말했다.
"이거, 우리 아들은 여섯 살이라 저를 알아볼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산타모자를 눈썹까지 눌러쓰고 덥수룩한 흰 수염으로 얼굴의 반을 가렸음에도 아이에게 걸릴까 봐 불안한 모양이었다. 원장님은 그 마음을 알겠다는 듯이 선글라스를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막상 눈까지 가리니 절대 아이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았다. 곧이어 행사를 이끌어가실 체육 선생님이 산타 복장을 하고 우리가 있는 방으로 들어오셨다.
"제가 멘트랑 율동을 하면서 아이들 호응을 이끌 테니, 뒤에서 가볍게 율동을 따라 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가끔 아이들이랑 스킨십해 주시고요."
"예, 알겠습니다!"
아빠들은 약간 긴장한 듯 답했다. 아무래도 이런 행사는 처음이다 보니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체육선생님은 이어서 말했다.
"아이들 한 명씩 호명하면서 선물을 나눠줄 겁니다. 옆에서 잘 거들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들의 걱정은 너무나 기우였다. 강담 구석 숨겨진 방에서 나와 이미 옹기종기 모여있는 어린이집 아이들 앞에 나타났을 때, 체육선생님은 완전한 산타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깜박 속아 넘어갈 만큼 완벽했다. 심지어 세 살 아이들은 산타할아버지 네 명이 우르르 나타나자 무서워하며 울기까지 했다. 우리 아이가 있는 네 살반 아이들은 신기한 듯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고, 다섯 살과 여섯 살반 아이들은 신나서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고, 캐럴 음악에 맞춰 춤도 추었다.
세 살반부터 차례로 한 명씩 나와 체육선생님 산타가 편지를 읽어주고 선물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물론 세 살 반 아이들은 대부분 산타할아버지를 무서워해서 선생님들이 대신 받아야 했다. 네 살반 아이들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는 내 눈에 익숙한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똥이와 같은 반 친구들이었다. 이들은 나름대로 씩씩했고, 이따금 부끄러워했다. 드디어 똥이가 나왔을 때 체육선생님은 내가 직접 선물을 줄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는 똥이를 자연스레 안고는 엄마가 써준 편지를 어색한 할아버지 소리를 내며 크게 읽었고, 이후 어린이집에서 준비한 선물을 직접 건네주었다. 똥이는 미처 아빠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체육선생님이 나와 본인을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똥이는 이 산타할애비가 좋아요? 저 산타할애비가 좋아요?"
똥이는 순간 고민하더니 체육선생님을 가리켰고, 그 행사에 참여하고 있던 선생님들과 분장한 아빠들은 몰래 웃었다. 나머지 다섯 살과 여섯 살 반 아이들까지도 무사히 선물을 나눠주었고, 아빠 산타 행사는 한 시간 반정도 진행한 끝에 마무리되었다. 이후에도 어린이집 어머니 한 분의 비올라 캐럴 연주가 예정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강당에서 모두 빠져나간 뒤에 체육 선생님은 산타 복장을 그대로 한 채 다른 행사장으로 빠르게 이동하셨고, 아빠 산타들은 다시 방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아이들이 못 알아봐서 다행이네요."
"아빠로서 아이와 좋은 추억 만든 것 같아요.
"나중에 산타가 없다는 걸 알 때쯤에 그때 산타할아버지가 아빠였다고 말해주려고요."
사복을 갈아입고 강당에서 나왔을 때 복도에 있던 똥이와 마주쳤다.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자연스러운 듯 반 아이들과 인사했다.
"얘들아, 안녕! 똥이도 안녕~"
똥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아빠가 어린이집에 왜 왔어?"
옆에 있던 똥이 같은 반 친구가 거들었다.
"똥이가 열나는 것도 아닌데 아저씨가 왜 왔지?"
나는 그냥 얼버무리고는 빠르게 어린이집을 빠져나왔다.
"어... 원장님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 이따가 집에서 보자."
아이는 아빠가 산타 행사를 하러 왔다는 생각은 전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집에 오니 피로가 밀려왔다. 아무래도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참여했던 아빠 산타 행사에서 무리를 좀 한 것 같았다. 아무 탈 없이 잘 끝냈다는 것에 마음이 풀리면서 급격히 체력이 떨어져서 곧바로 잠에 들었다. 점심을 대충 때우고 집안 정리를 좀 하니, 곧 하원할 시간이 다가왔다. 옷을 챙겨 입고 다시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아이는 나를 보자마자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쉼 없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빠, 나 오늘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줬어. 봐봐!"
"오~ 착한 일 많이 해서 선물 주셨나 보네?"
"산타할아버지가 네 개나 왔어!"
"네 개가 아니라 네 명이야, 똥이야."
역시나 똥이는 아빠가 산타할아버지 네 명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내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나와 아이에게서 각각 듣고는 아주 재밌어했다. 아빠와 아이 둘에게 분명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처럼 산타 행사에 심혈을 기울인 이유가 있다. 내 인생 최초의 기억이 네 살인지, 다섯 살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어린이집에서 산타할아버지에게 안겨 사진을 찍었던 추억이다. 무섭기도 하면서도 기쁘기도 한 오묘한 기분이 어릴 적 나의뇌리에 깊게 박혔던 모양이다. 분명 그 산타할아버지도 누군가의 아버지이거나 혹은 체육선생님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산타할아버지라고 굳게 믿은 나는 엄마에게 선물 받은 것을 자랑했었다. 이처럼 우리 딸에게도 산타할아버지가 안아주고 선물을 준 이 뜻깊은 기억에 오래 남기만을 바란다. 나중에 아이가 커서 "나 어렸을 때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준 게 기억이 나."라고 내게 말한다면, 나의 오늘의 수고는 기쁨이 되어 내 평생의 추억으로 자리할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사진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내가 아이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해줄 말이 많아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난 오늘에 감사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