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똥이애비 Mar 19. 2024

사원증이 더 이상 개목걸이가 아니게 되었다.

"사원증의 무의미"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취업 준비생이던 시절엔 회사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점심시간에 '사원증'을 목에 걸고 한 손엔 커피를 들고, 직장 동료들과 웃으면서 회사 주변을 여유로운 햇살을 받으며 산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피로를 달래기 위해 커피 수혈을 하는 것이고, 동료들과는 대놓고 싸우지 않으면 다행인 것이고, 따스한 햇살은커녕 빠르게 점심 먹고 부족한 잠을 채우기에도 바쁘다는 것이다. 특히나, 사원증은 소위 개목걸이라고 불리면서 여간 거추장스러운 게 아니다. 심지어는 사원증이 업데이트되어 사진이 박혀 있는데 이 웃고 있는 사진과 지금의 몰골이 비교되면서 더욱 현타가 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오늘은 이 사원증의 의미를 좀 더 깊게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사원증의 의미는 간단히 말해서 '내가 이 회사를 다니고 있어요'라는 징표다. 누군가에게는 사원증이 상장 같은 것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숨기고 싶은 치부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회사에 출근을 하게 되면 가방이나, 호주머니에서 주섬 주섬 사원증을 꺼내 목에 자연스레 건다. 마치 강아지가 산책 가자고 주인에게 목줄을 물어다 주는 것과 유사하다. 그리고는 사원증을 길게 늘어뜨려 보안이랍시고 굳게 닫혀 있는 게이트에 태그 한다. 그럼 문이 열리고 나는 회사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뭔가 허가받은 사람만 들어가는 특별한 절차 같기도 하지만, 수시로 반복하여 왔다 갔다 하면 게이트는 그냥 불편한 장애물 중 하나로 인식될 뿐이다.


  이렇듯 사원증은 회사 내 보안 구역을 출입할 수 있게 하는 기본 기능을 갖고 있다. 즉, 보안 상 회사 관계자가 아닌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실 그렇게 크게 보안으로 출입을 통제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PC 비밀번호가 걸려 있고, 문서 파일도 다 암호화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USB에 파일을 전송하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곳도 있다. 카페에서 핸드폰으로 자리를 맡아놓고 화장실도 다녀오는 대한민국에서 얼마나 큰 보안이 필요한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요즘 들어오는 신입사원들은 이 사원증을 자기만의 특별한 것으로 만들려 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사원증에 이것저것 스티커를 붙이고 꾸며서 패션 아이템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심지어는 잘 안 나왔다고 생각되는(내가 봤을 때는 똑같지만...) 본인 사진을 가릴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사원증 꾸미기'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사원증 꾸미는 것을 그리 내켜하지 않는 이들은 자주 가는 카페의 쿠폰을 사원증 앞뒤에 꽂아 놓는 경우도 있다. 도장이 10개면 커피 한잔이 무료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틈틈이 그들 사원증의 도장 개수를 살펴보기도 한다.


  사실 사원증의 숨겨진(?) 기능 중 하나는 게이트에 태그 되는 시간이 전산으로 입력된다는 것이다. 왜 개목걸이라고 불리는지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내가 출근해서 사원증을 게이트에 찍는 시간은 내 출근 시간을 증명하고, 퇴근하며 회사를 나올 때도 마찬가지로 사원증을 게이트에 태그함으로써 퇴근 시간이 자동으로 전산에 입력되는 것이다. 나의 출, 퇴근 시간뿐만 아니라 회사 밖에서 얼마나 나돌아 다녔는지 리얼하게 모두 체크해 볼 수 있다는 얘기다. 과거에는 어떤 임원이 이 전산으로 입력된 출근 시간을 전 직원들을 대상으로 모두 확인하여 상습 지각자들을 선별한 뒤 승진을 누락시킨 적도 있다. 이때부터 8시 30분 전에 출근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조금만 지각할 것 같으면 마치 단거리 육상선수처럼 게이트라는 결승선까지 힘껏 내달리는 진풍경을 볼 수도 있었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사원증의 기능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출, 퇴근 시간 그리고 회사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은 여전히 자동으로 전산에 입력되고 있다. 단지 자율 출퇴근 제도가 도입됨에 따라서 지각이 없어져 버렸다. 사실 없어졌다기보다는 회사에서는 직원들에게 시스템에 출, 퇴근 시간과 휴게 시간을 미리 직접 입력하게 한 뒤, 전산에 자동으로 올라오는 사원증 태그 시간과 매칭시켜 지각과 야근을 선별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결국 회사 일이라는 게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기 때문에 매번 시스템에 자기가 일하고 있는 시간을 미리미리 수동으로 입력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결국 직원들에게 부담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빈번하게 시스템 입력을 놓치는 경우도 발생한다. 누군가는 불만을 토로한다.


"아니, 그냥 사원증 태그 시간을 자동으로 시스템에 입력되게 하면 되는 거잖아. 뭐 이렇게 번거롭게 직원들이 직접 시스템에 시간을 입력하게 하고, 사원증을 찍은 시간은 별도의 전산 시스템으로 관리하는 거야..."


회사에서는 도대체 왜 이렇게 번거로운 개목걸이 시스템을 만들어 냈을까. 위에서 말한 불만처럼 사원증 태그 시간을 공공연하게 시스템에 자동으로 입력되게 하면 될 일을 말이다. 그럼 직원들이 직접 시스템에 출, 퇴근 및 휴게 시간을 입력하지 않아도, 몇 시에 출근해서 몇 시에 퇴근했고, 얼마나 회사 밖에 머물러 있었는지 시스템 상에서 적나라하게 관리할 수 있고 직원들에게 통보할 수도 있다. 하지만 회사는 바보가 아니었다. 앞서 제기한 불만에 대해 한 직원이 말했다.


"그렇게 되면 회사가 발목 잡히지. 시스템 상에 주 52시간 이상 근무시간 못 올리게 되어 있는데, 자동으로 출, 퇴근 시간을 시스템에 입력도록 하면 52시간 초과하는 직원들 수두룩하게 나올걸..."


어쩔 수 없이 주 당 52시간을 초과하는 근로자들이 상당히 많지만, 회사는 근로기준법을 어기지 않았다는 형식적인 증빙을 위해 실제 근로 시간(사원증 태그 시간)을 시스템에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다. 직원들이 스스로 52시간 내에서 근로 시간을 설정하게 함으로써 실제 초과되는 근무시간은 회사에서 나 몰라라 하기 위해서 또는 회사가 강제한 근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번거로운 절차를 직원들에게 떠넘기게 되었다.



  결국 사원증은 무의미해졌다. 자랑스러운 회사를 다닌다는 징표라기보다는 근로기준법을 우회하는 회사를 다니는 직원이라는 낙인에 더 가까워졌다. 기능적으로도 보안 구역을 출입할 수 있다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사실상 경비원이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영역일 뿐이며, 사원증을 태그함으로써 자동으로 전산에 입력되는 시간은 직원들의 근로시간을 직접적으로 대변해 주지 못하게 되었다. 사원증이 이제는 개목걸이만도 못하게 된 것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다. 주 52시간 근무제는 2018년에 개정되었지만, 아직도 회사는 과도기인 듯하다. 언젠가는 편법이 아닌 정당한 근로시간을 인정해 주는 회사로 거듭나길 바라며, 오늘도 난 아무 의미 없는 사원증을 주섬 주섬 꺼내어 목에 아무렇게나 걸어 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