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다니다 보면 관리 차원에서 소속 임원이 직원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회사에서 지시한 것인지, 임원이 자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꼭 이런 행사를 1년에 한, 두 번씩 한다. 코로나 시절엔 모이는 것 자체가 없어서 괜히 억지로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는데, 이제 또 슬금슬금 이런 행사가 기획되고 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번 행사는 직원들끼리 3~4명씩 조를 짜면, 임원이 돌아가며 한 조씩 점심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이었다. 조는 그냥 직급 순으로 짜였다. 돌고 돌아 어느새 내가 속한 조의 점심시간 차례가 왔다. 미리 임원에게 메일을 보내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드디어 임원과의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회사를 다닌 지 10년 차가 넘었지만, 소속 임원을 평소에 만날 일은 거의 없다. 업무 보고나 행사 자리에서 1년에 대, 여섯 번 정도 보게 되는데, 이번 점심식사 자리가 그중 한 번이 될 것이었다.
임원과의 식사 자리라고 해서 그리 특별한 음식을 먹는 건 아니다. 회사 근처에 있는 식당 중에서 임원의 기호에 맞게 메뉴가 정해지고 있을 뿐이다. 이번 메뉴는 순대국밥이었다. 다른 조에게 들었을 때 쌀국수를 먹었다고 했는데, 오늘은 어제 술을 마셨는지 순대국밥이 땡기는 모양이었다. 나와 함께 같은 조가 되어 식사를 하는 멤버 중 한 명은 나보다 연차도 높고 나이도 많은 부장님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나보다 3년 정도 아래인 평소에도 친하게 지내던 후배였다. 임원과 일하는 공간이 다르기에 1층에서 만나 식당까지 함께 걸었다. 할 말 없을 때 하는 날씨 얘기가 시작되었다. 임원이 하늘을 보며 말했다.
"날씨가 많이 풀렸구먼, 이제 봄이 오나보네."
"네, 그러네요. 시간이 정말 빠른 것 같습니다. 하하. 봄인데 어디 꽃구경 안 가십니까?"
역시 부장 직급은 달랐다. 임원의 바로 옆에 붙어서 어색함을 풀어내려고 발악하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대단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와 후배는 뒤에서 조용히 따라가기만 할 뿐이었다. 나도 언젠가 내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임원에게 저런 알랑방구를 뀌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동안 씁쓸해졌다.
식당에 앉아 메뉴를 시킨 뒤 우리는 한동안 말할 거리를 찾느라 방황했다. 평소에 서로에 대해 알고 있어야 공통된 주제로 얘기라도 할 텐데,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를 모르니 도통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헤매고 있는 것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돌고 있는 와중에 임원은 이런 분위기를 한, 두 번 겪어본 것이 아니기에 대화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우리 김대리는 요즘 회사 생활 어때?"
어색함을 깨기 위한 가벼운 질문일 수도 있지만, 이 질문에는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다. 일하는 데 어려운 부분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일 수 있고, 회사에 대한 불만은 없는지, 요즘 젊은 직장인은 회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후배도 어느 정도 회사 생활을 해왔기에 눈치 빠르게 모법답안을 꺼내 놓았다.
"같은 팀 선, 후배님들 덕분에 잘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 다행이구만. 회사는 역시 함께 일하는 동료가 중요하지."
"네, 맞습니다."
뜨끈한 순대국밥이 나오고, 우리는 각자의 기호대로 양념과, 새우젓 그리고 심지어는 깍두기 국물까지도 넣어 커스터마이징 했다.임원의 "맛있게 먹어요." 하는 소리에 "잘 먹겠습니다."라고 답하며 동시에 숟가락으로 밥을 퍼서 국에 말았다.
식사를 하며 분위기가 조금 풀리자 다양한 얘기들이 오갔다.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보니 회사 얘기들이 주를 이뤘는데, 그러다 블라인드라는 직장인 플랫폼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그곳은 회사 메일만 인증하면 익명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다. 우리 회사 게시판에는 익명의 직원들이 작성한 다양한 글들이 있지만, 그 와중에 회사와 관련된 루머들이 엄청나게 돌고 있다. 나도 관심 있게 보던 터라 그 루머 중 하나를 꺼내 얘기했다.
"블라인드 보니까 우리 회사가 분사한다는 소문이 있더라고요."
그러자 임원은 순간 당황해하며 숟가락을 멈췄다. 이미 임원은 블라인드라는 플랫폼을 알고 있었고, 그 소문에 대한 진실도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숨기기 바빴다.
"아니, 누가 그런 소문을 내는 거야 대체... 흠흠. 너무 걱정 말아요. 나한테 보고된 건 없으니까..."
임원이 너무나 당황해하는 모습을 본 우리는 확신했다. 그동안 과거 소문만 무성했던 회사 관련 얘기들이 몇 년 뒤 실체화 되는 걸 겪어왔기 때문이다. 이번 루머도 조만간 실행될 것임을 임원의 반응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와중에 후배가 거들었다.
"블라인드에서 회사가 지방으로 이전한다는 소문도 있던데요?"
임원은 순간 화가 났는지, 얼굴이 빨개지며 말했다.
"블라인드 볼 시간에 업무에 집중이나 하세요. 쓸데없는 말들에 현혹되지 마시고."
그 순간 우리 셋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이런 얘기들을 허심탄회하게 풀어놓기 위해 만든 자리라 생각했지만, 역시나 아니었다. 그저 이 임원과의 소통의 시간은 허례허식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급속도로 분위기가 다시 어색해진 우리를 의식하듯 임원은 다른 주제를 꺼내며 말을 돌렸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이직이나 퇴사가 많던데, 회사에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나? 뭘 좀 해결해 주면 좋을 것 같나?"
풀이 죽어 있는 후배를 대신해서 내가 말했다.
"글쎄요. 아마도 임금 경쟁력도 많이 떨어졌고, 회사가 미래 비전도 확실히 제시해 주지 못하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임원은 내 말을 듣고 심기가 불편한 듯 말했다.
"옛날엔 지금보다 어려웠는데... 참, 요즘 애들은 이게 당연한 건 줄 안다니까... 안 그런가 이 부장?"
"아, 예. 그렇죠."
옆에 가만히 듣고 있던 이 부장은 놀라며 답했고, 이에 흡족한 듯 임원은 이어서 말했다.
"분위기도 자유로워졌고, 임금도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고, 조직문화도 좋은데 말이야. 도대체 이해가 안 가. 왜 다른 데로 가려는지..."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얘기를 이어갈 동력을 잃었다. 벽을 보고 얘기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소통의 시간이 아니라 불통의 시간이었다. 자리가 불편해서 먹었던 순대국밥이 체하지는 않았는지 오히려 걱정이 되었다.
1년에 몇 번 되지도 않는 임원과의 소통의 시간이 앞으로 다른 조들도 이렇게 흘러갈 거라 생각하니, 답이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블라인드 회사 게시판에 익명의 누군가와 얘기하는 게 더 긍정적인 소통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서로 이렇게 시간과 에너지 낭비 하지 말고 소통을 하려면 툭 터놓고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익명의 힘을 빌려서라도 말이다. 다음 5월에는 무슨 팀 대항 족구 대회가 예정되어 있던데, 거기서 또 임원은 어떤 불통으로 직원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차라리 이럴 바엔 이런 역효과만 나는 소통의 시간이니, 화합의 장이니 싹 다 없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오히려 이게 직원을 괴롭히는 일이라는 걸 윗사람들은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