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딸이 드디어 26개월 만에 말문이 트였다. 그동안 단어만 나열하더니, 이젠 제법 문장도 구성하고 의문문도 말할 줄 안다. 이제야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은 생존에 필요한 것들, 싸고 먹고 자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어서 약간 동물을 돌보는 느낌이었다면, 이젠 아이가 정말 사람 구실을 하나씩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럽다. 나도 어느 순간 다른 아빠들처럼 '딸바보'가 되어가고 있는 듯했다, 딸바보란, 딸 앞에서 바보가 될 정도로 딸을 너무나 사랑하는 아빠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내가 어쩌다 바보가 되어 버렸을까. 나를 사랑의 바보로 만들어버린 우리 딸의 매력을 하나씩 풀어볼까 한다.
아이, 귀여워!
요즘 아이가 역할 놀이를 좀 할 줄 안다. 어린이집에서 배운 건지, 본인이 선생님 역할을 하고 나를 아이 다루듯 한다. 어느 날 함께 장난감을 갖고 놀다 말고 갑자기 나에게 "침대에 누워!"라고 말했다, 이제 아이에게 이 정도 말은 식은 죽 먹기다. 나는 장난감 갖고 놀다 왜 이러나 싶었지만, 모든 아빠들이 좋아하는 병원놀이 환자를 시키고자 하는 것 같아서 군 말없이 침대로 가 누었다. 이럴 때 아니면 대놓고 누워있기가 힘들기 때문에 군대에서 명령을 받들 듯 즉각 행동했다. 환자처럼 아픈 척하며 누워 있는데 아이는 의사로 변하지 않았다. 갑자기 자장가 멜로디가 나오는 장난감을 켜더니, 이불을 끌어 내 몸을 덮어주었다. '아 , 어린이집 낮잠 시간이구나!' 드디어 감이 왔다. "선생님, 잠이 안 와요!"라고 아이에게 말했다. 아이는 내 가슴을 토닥토닥하더니 '쉿!'이라고 말하며, 조그마한 검지 손가락을 자신의 입에다 갖다 대었다. 선생님을 흉내 내는 게 너무나 귀여웠다. 그래서 귀엽다고 말해주려 했는데, 아이가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아이, 귀여워!"라고 사랑스럽게 말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계속 토닥토닥해주면서 볼에 뽀뽀까지 해주는 것이다. 아마도 어린이집 선생님을 따라한 것이겠지만,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나를 매혹시켰다.그리고 가장 좋았던 건 한참을 계속 눈감고 누워 있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우리 효녀, 아빠가 놀아주느라 힘든 거 알고 눕게 해 줘서 고마워! 근데 네가 훨씬 더 귀엽고 사랑스러워!"
아빠, 일어나 아침이야!
평일엔 아침 일찍 회사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서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가 곤히 자고 있는 모습만 살짝 보고 나가는데, 깊게 잠들어 있는 아이의 모습이 한동안 눈앞에 아른거린다, 하루를 힘차게 시작할 수 있는 나만의 자양강장제이다. 하지만 주말의 모습은 조금 다르다. 평일에 쌓인 피로로 나는 주말엔 알람을 꺼놓고 늦게까지 푹 자려고 한다. 분명 핸드폰 알람을 맞추지 않았는데, 정확히 8시가 되면 알람이 울려온다.딸 알람이다. 처음 말문이 트이기 전엔 이렇게만 말했다. "아빠, 아침, 해님!" 표현하고 싶은 단어만 나열하는 식이다. 그러고는 나머지 하고 싶은 말은 행동으로 직접 표현한다. 그래서 내 머리채를 잡고 있는 힘껏 당긴다. 일어나란 의미다. 그럼 난 반 강제로 기상하게 되는 패턴이다. 몇 주간 그러다가, 이제는 다행히 머리채를 잡히지 않고, 말로만 표현한다. "아빠, 일어나! 아침이야. 배고파! 맘마 줘."까지 얘기한다.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더 이상 누워있을 수만은 없다. 아이가 배고파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는 부모는 없기 때문이다. 배고프단 말에 벌떡 일어나 아침을 준비한다. 주말 아침이지만, 아빠 생체 리듬 깨지지 않게 부지런 떨게 해주는 아이가 고맙다기보다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로 구체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이 더욱 고맙다. 이제 대화가 통하니 더 사랑스러워지는 것 같다.
"딸아, 좀만 더 크면 아빠가 늙어서 아침잠이 없어지는 순간에, 늦잠 자고 있는 너를 깨워줄게! 부지런하게 주말을 시작할 수 있도록 아침 요리사가 되어 줄 테니, 아빠가 일어난 것처럼 벌떡 일어나 주렴. 너의 생체리듬을 위한 것이니 변명은 필요 없단다. 그리고 네가 어렸을 때 아빠를 깨웠던 일에 대한 복수가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말기 바란다."
아빠를 잃어버렸어...
나는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도, 꾸준히 운동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아이가 없을 때처럼 일주일에 5~6번씩 헬스장에 가지는 못하지만, 지금은 최소 일주일에 2~3번은 가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운동을 가는 날에는 시간을 좀 더 타이트하게 관리한다. 평일에 운동을 할 때는 회사에서 일찍 퇴근하고 6시 반쯤 집에 온다. 장모님과 놀고 있던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고, 아내가 올 때까지 아이와 놀아준다. 아내가 요즘 퇴근이 조금 늦어 7시에서 8시 사이에 집에 오게 되는데 그때까지 아이와 교감을 충분히 쌓는다. 아이를 두고 운동을 가야 하기에 미안함 마음으로 밀도 있게 놀아주는 것이다. 그러고는 8시쯤 아파트 지하 1층의 헬스장으로 향한다. 어느 날 아이가 아내랑 놀이터에 가고 싶어 해서 나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탄 적이 있다. 아이와 아내는 1층에서 내리고, 난 지하 1층에서 내려 헬스장에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내에게 영상 통화가 왔다. 영상에서는 아이가 놀이터 앞에서 서럽게 울고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었다. 아이가 울면서 대답하기를 "아빠 잃어버렸어... 아빠 찾아와! 나 여기 있을게..."라고 말했다. 아이에겐 아빠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는데, 내릴 때 보니 아빠가 없던 것이다. 충분히 말해줬어야 하는데, 아차 싶었다. 그러면서도 날 이렇게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아이의 모습에 뭔가 뿌듯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딸아, 네가 커서 스스로 독립할 때까지 아빠는 절대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을 거야! 그래서 건강도 챙기고 운동도 하고 있는 거니까, 아빠가 틈틈이 운동하는 시간은 좀 기다려 주면 고맙겠구나. 그러면 아빠가 더 오랜 시간 동안 너와 함께 할 수 있을 거야."
마지막으로 아이가 아빠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날, 아내가 그 장면을 찍어 나에게 보내준 영상을 공유하고자 한다. 이 영상을 마지막에 담은 건 다른 사람들에겐 그냥 찡찡대는 아이의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에겐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여운 영상이다. 왜냐하면 내 딸이고, 난 내 딸과 사랑에 빠진 어쩔 수 없는 '딸바보' 아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