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R] The Taste of Things Movie Score Suite - Andrew von Oeyen (2023)
해외 레스토랑에서 개인적으로 메뉴판을 보면서 음식을 주문하고 내 입맛에 맞게 먹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외국인이 한국어를 읽을 줄 안다고 하자. 아니 메뉴판에 영어로 재료와 기타 음식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다고 보자. 돌솥비빔밥을 정성껏 해석하여 주문하고 거기에 고추장을 약간 넣고 참기름도 적당히 넣고 비벼 먹는 것을 알기나 할까! 그리고 음식은 왜 이렇게 뜨거운지 아마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우리도 외국에서 음식을 주문해서 먹는다는 것이 이와 마찬가지다.
메뉴판을 아무리 정성껏 제작하였다 하더라도 그 나라의 음식 문화를 한 두줄의 단어 나열로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 일행 중 한 사람은 이렇게 얘기한다. 메뉴판 순서대로 주문해 볼까요? 아님 1, 3, 5, 7 혹은 2, 4, 6, 8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극단적인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다. 바로 러시안룰렛을 하는 식이다. 주문대로 정확히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식탁에 차려진 음식의 종류와 수량은 맞다. 여행을 좀 다녀본 사람들의 특징이다. 6명이 식탁에 둘러앉아 3~4개의 수프를 주문하고 수프가 나오면 수저를 서너 개 더 달라고 요청한다. 6개를 모두 시켰을 때 혹시 너무 짜든지 하면 실패한 주문이기에 그렇다. 왜 안 되겠는가 필자의 경우 두 종류의 수프 혹은 샐러드를 주문해 음식의 향과 맛을 보기도 한다. 주요리는 5개 서로 다른 것을 주문하기도 한다. 그런데 각각 본인 앞에 놓지 않고 한국식으로 중앙에 놓아달라고 부탁하고는 앞접시를 사람 수만큼 다시 별도 요청을 한다. 그리고는 사람 수만큼 자르고 각각 나누고 이 접시 저 접시 옮겨가면서 서로 나누어 먹는다.
유럽인들 식문화 정서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격식으로 똘똘 뭉친 그들의 테이블 매너에서는 참 쉽지 않은 식사 문화다. 잘 났다 못났다의 잣대가 아니라 다르다는 기준으로 보아야 할 것인데 좀 요란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의 문화가 수요자 공급자 고객이란 이름으로 소비자가 왕인 문화적인 범주에서 생활하다 보니 종원에게 Please와 Excuse 그리고 그 중요한 Thanks의 언어적인 문화가 아직도 생활 속에
깊이 침투하지 못한 듯하다. 늘 그 부분이 아쉽다고 생각한다.
이제 주문한 음식의 맛을 보니 전체적으로 짜다. 몹시 짜다. 먹지 못할 만큼 짜다. 유럽 음식이 짠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유럽은 전반적으로 아시아와 비교해 기압이 낮아 저혈압 환자가 많은 편이다. 그래서 두통을 많이 호소한다. 염분끼가 있는 음식은 혈관을 확장해 혈액순환을 돕는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또한 역사적으로 소금은 병사들의 급료로 지급될 정도로 귀하게 여겼다. 샐러드(Salad)는 솔트(Salt)를 어원으로 하고 있다. 그 정도로 중요하다. 성 안의 높은 사람들이나 향신료와 소금에 절인 상하지 않은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그것이 유럽인들의 습관 속에 남아있다 보니 귀한 손님이나 친구가 오면 음식을 짜개 만들어주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원활한 물류가 가능해지기 이전까지는 유럽의 몇 장소에서 채굴되었던 땅속의 소금을 식용으로 사용하였다. 대표적인 장소로는 지명에도 남아있는 잘츠부르크(소금성)가 그렇고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크라쿠프의 소금광산이 있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바다를 접하지 않고도 성장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소금이 채굴되는 산맥을 보유한 이유도 필요조건에 해당된다. 바다에서 생성된 암염층이 대륙의 융기와 함께 해수면 위로 솟아올라 소금 산이 형성된 것이다. 그것이 오랜 세월 비와 바람을 맞으며 희석되었으니 해염에 비해 농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음식 맛은 손 맛이란 말처럼 땅속의 소금을 사용하던 습관이 있어서 이제는 해염을 사용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습관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편하게 이해하려면 우리가 맵게 먹는 것을 좋아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왜 맵게 먹는가? 정신 번쩍 나라고 알싸하라고! 습관적으로 그렇게 먹었으니까? 매워야 먹은 것 같으니까! 역지사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분석하기보다는 그들은 그렇게 오랜 기간 생활해 왔고 앞으로도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