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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 지 Nov 10. 2022

또 한 계절을 보내며 쓰는 에필로그

남한강 인근 마을로 향하는 출근길엔 짙은 안개가 잦다.

안갯속을 지나는 도로에 가끔 로드킬 당한 고양이의 애달픈 모습이 보일 때면 어쩌면 내 밥 먹던 그 아이들 중 하나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에 아려지곤 한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나는 그저 천천히 차선을 바꾸며 다음 생엔 부디 따뜻한 밥 먹으며 춥지도 덥지도 않게 마음 편히 지내는 곳에서 태어나라는 기원만 담을 뿐.



해가 하늘로 온전히 오르기만 하면 하늘은 또 언제 안개를 허락했나 싶게 청명해진다.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말뚝박기 망까기 말타기...
그런 놀이는 이제 낡은 동화책 속 빛바랜 삽화로 사라져 흔적이 없다.


작은 마을 작은 학교에서도  도시의 시간이 낯설게 지나갔나 보다. 말할 수 없는 긴 사연을 성숙시켜가는 아이들과  에필로그를  쓰듯 하루하루를 보낸다.


무료한 일상. 지루한 학교 생활. 맛있는 간식도 자주 나가는 현장학습도 별 감흥 없어하는 아이와 보내는 긴 하루하루. 커다란 아날로그 벽시계의 시침과 분침 읽는 법을 설명하면서 그저 시간 보내는 일을 함께 찾아보자고 했다. 노래 부르기, 그림 그리기, 책 읽기, 공놀이하기, 글씨 쓰기, 계산 공부를 하다 보면 시간이 어느덧 쉬는 시간을 가리키고 또 몇 가지 재미있거나 재미없는 일을 하다 보면 점심시간이 되고 하교시간이 되니까. 아이는 너무너무 공부가 싫은 날엔 그냥 시계바늘이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 움직인다."하고 말할 때 난 정말 기뻤다.


"비밀이 있는데, 시계 바늘은 재미있는 일을 할 때 빨리 가. 근데 네가 젤로 지루한 일을 겨우 끝냈을 때 보면 제일 빨리 가 있다는 걸 알게 될거야"

아이가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알게 될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나는 말했다.


"매일 행복할 수는 없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작은 학교 벽에 예쁘게 쓰여 있는 그 말처럼 "모든 시간이 재미있을 수는 없지만 시간을 지내다 보면 재미있는 일이 많아" 하는 걸 알게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낸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며 울던 아이가  손을 잡으며 활짝 웃는 얼굴로 까르르 웃음소리를 들려주는 선물 같은 날도 있고, 화가 잔뜩 난 아이가 입술을 앙다물며 손을 할퀴어 며칠째 쓰린 손가락에 약을 바르는 날이 지나기도 한다.


언제든 이곳을 떠나 내 쉴 자리로 돌아가버릴 수 있는 나는 그래서 더더욱 이 힘들고 지루한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긴 일상이 애잔해진다.


안개 낀 하늘과 청명한 하늘 사이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아이들과 젊은 엄마들과 젊은 선생님들을 향해 비로소  찬란한 무지갯빛 기원을 할 수 있게 된 내 에필로그의 시간이 겨울로 들어가고 있다.


안개는 걷힐 것이니 가을의 들판에서 차곡차곡 모아 둔 건강한 씨앗들을 가슴에 품고 다가오는 겨울을 이겨내길. 그리하여 드디어 겨울이 지나가는 계절이 되면  묻어둔 기억의 땅 속에서 가장 예쁜 새싹으로  청명한 하늘 아래 마음껏 피어나 주기를.


해는 일찍 저물어서 어둑해진 시골길을 지나 집 앞에 차를 세우면 아침에 사료를 담아놓고 간 빈 그릇 앞으로 누런 고양이 두 마리가 다가온다. 저녁 사료를 담아놓고 마당에 떨어진 낙엽을 쓸어 모으고 몇 가지 집안 정리를 하다 보면 순식간에 깜깜해져 밖에 나갈 일이 없는 시골의 긴긴밤. 넷플릭스 드라마, 유튜브, 뜨개질, 핸드 위빙, 아이들과 함께 지낸 낮시간들을 되짚어가며 익숙한 행동 분석을 하고 강화제를 찾다 보면 짧은 하루는 다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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