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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 지 Oct 03. 2022

격리 마지막 날

방콕러! 적성의 발견

주방 살림에 관심도 지식도 없는 남편이 화장실 딸린 안방에서 지냈다. 남편은 아침 일찍 운동을 나가고 산책을 나갔다가 밥을 먹고 내가 필요한 물건들을 사 오면서 집에 들어와 있는 시간엔 안방 문을 닫고 시간을 보냈다.


코로나 격리를 시작할 때 가장 아픈 날은 이미 지나고 있었으니 난 가라앉은 목 말고는 별다르게 치료가 필요 없는 상태에서 오히려 센 약에 취해서 잠을 자다 깨어나면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어먹고 설거지를 했다. 하루에 한 개씩 찌든 냄비 얼룩을 벗기며 닦다가 나도 모르게 재미가 들려버렸다. 찌든 냄비를 이렇게 반짝반짝 닦을 수 있는 재주가 나한테도 있었다니... 내친김에 가스레인지와 오븐의 묵은 때까지 닦아버리느라 난 내 평생 주방에서 보낸 시간을 다 합친 것만큼의 시간을 주방에서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딸아이 방 베란다를 정리하다가 구석에 보관하고 있던 딕시밴드 전화기를 찾아 나왔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집전화기로 사용하려고 샀다가 휴대폰을 사용하게 되는 바람에 쓸모가 적어져 창고로 들어갔던 것이었다.


도널드와 구피와 미키의 플라스틱 흰 모자와 몸통 구석구석에 앉아있는 십오륙 년 동안의 검은 때를 닦아내는데 한 시간이 넘게 걸린 것 같다.


이 전화기를 골라서 아이들 방에 놓아둘 때 세상이 아이들에게 디즈니 만화처럼 재미있고 활기찬 곳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전화기와 함께 일찌감치 딸아이가 자신의 컬렉션에 편입시키겠다고 했던 내 물건들을 딸의 인형들이 있는 자리에 함께 올려둔다. 마리화나가 그려져 있는 비틀스의 써전트페퍼 론리 하트 클럽 엘피판과 조르주 무스타키음반이 올라가 있는 미니턴테이블까지.

여전히 아이들에게 재미있고 우호적인 세상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함께 담았다.


그러고도 시간이 가지 않는 날엔 반짇고리를 열어 몇 년째 손대지 않고 있는 실타래들을 꺼내 아크릴판에 하나하나 감아가면서 핀터레스트에서 덴마크 텍스타일 디자이너가 효과적인 시간 낭비로 추천한 작품을 따라 해 보았다. 울이나 실크가 아닌 면사로도 만족한 결과물이 나와주었기에 작년 자가격리를 할 때 제주도의 봄 한 달 살이를 생각하며 만들었던 마크라매와 함께 보관하려고 한다.



애착에 문제가 있어서 정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들의 놀이치료를 할 때 나는 실을 즐겨 사용하곤 했었다. 포근하게 가공된 양모 실타래를 공처럼 허공에 반복해서 던지다 보면 바닥에 한올한올 풀어져 뭉쳐가는 실뭉치들이 종종 아이들이 기뻐하는 오브제가 되어주곤 했었다.


얇은 면사를 색색깔로 차근차근 감는 일만으로도 하루 몇 시간 정도는 저절로 흘렀다.


방콕은 내 취미에도 적성에도 꼭 맞는 일이라는 재확인의 시간이 이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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