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츠와프 기차역에서 열차가 지나가는 선로 밑으로 나지막하고 작은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거리가 있다. 퇴근시간이 될 무렵 하나 둘 불이 켜지는 골목에 장작 태우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커피, 와인, 네 개의 벽이라는 이름의 양조장, 값싼 가격의 안주가 있는 펍, 아마 잎담배를 뜻하고 있을 약초가게 등 친구들과 가벼운 수다를 떨거나 떠들썩하게 몰려다니면서 술 마시고 수다를 나누기에 더 없을 듯싶어 보이는 골목이다.
어두워지기 전 골목을 산책하다가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가게 앞 칠판에 적힌 메뉴 사진을 찍는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여성이 내가 지나온 그 자리로 가서는 내가 사진에 담은 것이 무엇인지 확인을 했다.
적혀있는 글자의 뜻을 알고 싶어서 번역기를 돌려보면 슬로베니아어, 체코어 등으로 나오는 각양각색의 간판들 사이로 눈에 쏙 들어오는 간판이 하나 있었다.
'시네마 천국'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영화.
그 영화 속에 들어있던 인생사의 모든 표현과 색깔이 다 좋았다.
100일을 기다려 공주의 약속대로 결혼을 하게 될 것만 같았던 병사가 왜 99일째 밤에 떠나버렸을지 생각에 빠지는 순간도 좋았다.
낯선 거리를 걷다가 눈에 들어온 낯익은 글자 속으로 불쑥 떠오르는 기억들을 채워가며 혼자만의 이야기를 다시 쌓아보았다.
그때 브로츠와프의 기찻길 밑 선술집 거리에 있는 술집 시네마천국이 내 눈에 들어왔어.
나는 그 앞을 서성이며 영화 필름만 가지고도 심장까지 적시게 만들던 토토와 알프레도의 우정의 이야기를 떠올렸지.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던 알프레도의 말대로 무척 큰 방황과 실수투성이 20대를 그 영화 속에 넣어두고 나도 떠나왔었거든.
이제야 말이지만 그게 어디, 가서는 영영 오지 말라는 그 말이 꼭 그런 의미만은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 수가 있었겠어? 그래도 말이지, 친절한 알프레도는 그 외로운 시간을 무던히도 잘 지내왔다고 자꾸만 자꾸만 칭찬해 주더라. 원래 찬란한 건 외로운 거라고. 싹둑싹둑 가위질당해야 할 정도로. 세월이 지나서도 여전히 찬란할지는 장담 못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병사가 공주를 떠난 순간에 모든 이야기가 완성된 것 아니었겠어?
전쟁 벽화를 역동적으로 그려놓은 파노라마 전쟁박물관과 그 앞에 있는 방공호 요새를 둘러보고 오데르강 산책로를 걸었다. 먹이를 주는 사람 주변으로 모여든 백조 떼와 강 건너로 보이는 성당의 섬 풍경이 모질고 모진 전쟁의 역사를 어떻게 담아 흘려보낼지 묻는 듯하다.
“평생 동안 우리는 사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라고 세네카는 2000년 전에 말했다. “더욱이 흥미를 돋우어 주는 것은, 생을 통해서 인간은 죽기를 배워야만 한다는 사실”이라고 에리히 프롬은 말했다. 인간은 살아가면 갈수록 더 많은 것들을 체험할 것이고 따라서 더 많은 죽음들도, 더 많은 기쁨과 더 많은 고통들도 체험할 것이다. (스캇펙, 아직도 가야 할 길)
나는 내일이면 이곳 브로츠와프를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게 될 것이다. 아마도. 평생 동안 사는 방법을 배우면서 그것을 통해 또한 죽기를 배우고 있는 내 인생의 시간이 그렇게 예정하고 있을 테니까.
대부분 익숙한 것에서 편안함을 느끼지만 여행이 거듭될수록 낯선 곳에서도 익숙함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진정한 여행의 고수는 익숙하고 편안한 삶의 어떠한 장면에서도 낯섦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 여행이 끝나고 나면 이 모든 여행의 기억들을 마음에 담아두고 이제 굳이 이렇게 멀고 낯선 여행지가 아닌 곳에서도 충분히 낯선 나를 만날 수 있기를. 가까이에서 만나게 되는 더 많은 삶과 더 많은 죽음, 더 많은 기쁨과 더 많은 고통들을 한결같은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