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의 한 끼 식사

by 미 지

아버지는 많이 무서운 분이셨지만 날마다 그러하지는 않으셨다.

추운 겨울밤이면 다섯 식구가 이불을 둘러쓰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아버지의 재미난 옛이야기를 듣는 날도 많았다. 사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더 재미있었다.

계모 밑에서 자라는 당신을 안쓰러워하시면서 당신 할아버지께서 들려주셨다는 요순임금 이야기와, 어머니를 잃은 설움으로 폭군이 된 광해군 이야기와 한 때의 영화가 물거품이 된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반복해서 그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들려주셨던 건 일찍 돌아가신 당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 이야기를 날마다 들려주셨다는 당신 할아버지가 주신 것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아버지도 나중에야 알았을 것이었다.


"내가 먹을 한 끼니가 거기서 준비되고 있으니까 그곳까지 가게 되는 거지."

어느 날 저녁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을 때 아버지가 무언가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은 이야기를 하셨다. 그때 난 내가 먹을 한 끼니가 미국이나 프랑스나 어디쯤에서 준비되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누군가 나를 위해 만들어준 밥 한 끼, 누군가 나를 위해 농사지은 작물들로 만든 밥 한 끼를 앞에 하면 가끔 아버지의 그 말씀이 생각이 난다. 여행을 가서 먹는 음식 앞에서는 더 많이, 더 자주 생각이 난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그 말씀은, 사실은 살면서 간혹 억울하게 내 것이 다른 사람에게로 가 버렸을 때 스스로 마음을 위로하는 데 훨씬 더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었어도 그건 처음부터 그의 밥 한 끼를 위해 준비되었던 거라서 제자리를 찾아간 것일 거야. 그런 마음을 먹을 때 제법 도움이 되기는 했다.


폴란드 기차 티켓은 어플에서 사는 편이 여러모로 편리하다. 몇 가지 정보만 입력하면 마음대로 티켓을 사고 반환할 수 있다. 반환할 때는 카드 결제 취소나 현금 반환이 아니라 제법 많은 금액의 수수료를 제외하고 철도청 포인트로 들어오니 심사숙고해서 표를 골라야 한다.

브로츠와프에서 그단스크로 가는 IC열차는 1등석으로 표를 구입했다.

한 부스 안에 6명이 앉을 수 있게 되어있다. 그단스크에 도착할 때까지 나를 포함해 3명이 넉넉하게 앉아서 올 수 있었다.

식당칸도 있지만 가끔 음료와 스낵을 담은 카트가 지나가고 승무원이 필요한 것이 있는지 물으러 오기도 했다.

다섯 시간 정도 걸려서 오는 동안 지루할 때면 복도로 나가 차창 밖을 바라보며 스트레칭을 하기도 했다. 이 열차는 예정시간에서 1분 1초도 틀리지 않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해안도시 그단스크의 하늘은 맑았다.


메인역에는 엘리베이터가 보이지 않아서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역사를 나왔다. 혼자 여행을 할 때 가끔 만나는 이런 난감한 상황을 대비하느라 나는 큰 캐리어 대신 작은 캐리어와 그 캐리어에 결합시키는 가방으로 짐가방을 챙긴다. 두 가방을 분리시켜 한 손에 하나씩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면 조금 덜 힘들어 보이는 모양새로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


예약한 레지던스가 있는 구시가지 출입통로를 들어서자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모습이 나타났다. 전단지를 든 호객꾼들이 지나는 행인들에게 말을 붙이며 저마다 다른 건물을 향해 손짓을 하고 있었다.


호텔 체크인을 마치고 식사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을 때 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이 돌아가며 내게도 말을 붙였다.


'밀? 푸드! 찹찹! 냠냠!'


구글지도에 추천이 많은 폴란드 식당에는 자리가 없었다.

다른 식당에 가서 으깬 감자, 구운 사과와 야채로 만든 비고스와 함께 나오는 포크커틀릿을 주문했다. 메뉴판에 '구운 사과'가 적혀있기에 사과구이가 곁들여지는 줄 알았는데 볶은 김치 맛이 나는 비고스에 사과가 포함된다는 뜻이었다.

조미료나 향신료가 없이 재료 본연의 맛을 내는 폴란드식 조리법으로 만들어진 음식 다운 맛이었다. 무뚝뚝한 맛이어서 천천히 오래오래 먹을 수 있으니 위장 건강에는 좋을 것 같았다.


숙소는 아파트가 아니니까 위층이나 옆방 소음은 없다.

아직 연말연시의 분위기가 남아있는 LED 전구 장식이 둘러진 골목에 소란스러운 파티 분위기의 행인들 소리가 밤이 늦도록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여행객이 자주 오가는 작은 마을, 소란함을 감추지 않는 사람들이기에 혼자 길을 걷는 일이 약간 불편하게 느껴지는 시선과 제스처를 골목마다 만난다.

이런 번잡스러움이 부담스러워서 2-30대에는 혼자 여행을 하겠다는 용기를 내지 못했었다. 그리고 사실 이런 사람들은 남녀불문 젊은 여행객들에게는 조금 더 끈질기게 호객을 하곤 한다.

지금의 나에겐 뭐, 이런 사람들... 시선 주지 않고 걸어가면 다들 그냥 멈추고 돌아서 자기 갈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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