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온 세 명의 여자 친구들은 저절로 나이가 가늠이 되는 깊은 주름 속에서도 소녀처럼 기쁜 표정과 약간 하이톤의 목소리 속에 웃음을 섞은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저 먼 곳까지 끝이 보이는 길이 있었고 가지 않았고 파도와 갈매기들이 들려주는 소식을 들으며 발길을 돌렸다.
그드니아에 내려서 해안가를 찾아가는 길은 조금 복잡했다. 요트정박장 앞 워터프런트 주변에 약간의 산책로를 빼고는 여기저기 공사 중이었기 때문에 가다가 돌아서고 또 가다가 돌아가고 그래야 했다.
항구에 정박해 놓은 요트들을 보아도, 사방에 공사 중인 크레인들을 보아도, 그 사이로 설풋설풋 비치는 해안가의 풍경을 보아도 그드니아가 가까운 미래에 가지게 될 화려한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분열된 정치와 세계정세 때문에 한동안 잠들어있던 나라였을지도 모르지만 각성과 함께 눈부시게 숨겨둔 본모습을 보여주며 일어설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이른 시간에 눈이 녹지 않은 도시를 다니다 보니 걸음도 빨라지고 문 연 식당이나 쇼핑몰도 없어서 두 곳의 기차역에서 내려 2킬로미터 내외에 있는 항구까지 산책 삼아 걸었어도 다섯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혼자 가면 빨리 가고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다. 혼자였으니 무척 빨리 다녀왔다.
내일 눈이 온다고 한다.
오늘과 내일 이곳에 머물 예정이니, 눈 오는 내일의 산책과는 사뭇 다를 오늘의 그단스크 산책을 서둘러야 했다.
오전에 보았던 해안가의 햇살은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 조금 흐린 하늘에 늦은 겨울의 수심을 약간 머금은 모습으로 썰렁한 회전목마와 조선소와 회전관람차가 서 있었다.
교환학생으로 온 듯한 여학생 하나가 친구와 오랫동안 전화통화를 하며 길을 걷고 있었다. 산책 코스가 같아서 근처에 보이는 아이스크림 가게와 호박장신구를 만드는 가게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으며 일부러 다른 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두 골목을 지나서 여전히 통화를 하고 있는 그녀를 또 만났다. 골목이 끝날 무렵 이번에는 그녀가 다른 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드우가 거리는 역사 깊은 동네라서 이곳저곳 발길을 돌릴 때마다 새로운 골목이 나름의 개성 있는 표정으로 나타나곤 한다.
내 숙소는 골든게이트 옆에 있어서 꼭 그 게이트를 통과해야만 갈 수 있는 골목인 줄로 알았는데 길을 걷다 보면 불쑥 또 다른 게이트가 나타나곤 했다. 꼭 그 골든게이트를 통과하지 않아도 내 숙소까지 오는 길도 많았다.
이야기가 쌓이다 보면 문명이 문화가 된다.
골목마다 거리마다 그동안 숨겨두었던 이야기들이 꽃을 피워서, 역사 속에 감추어 둔 이야기들이 '고단한 사실'을 전달하는 기능에서 약간만 벗어나서 가슴속의 숨겨 둔 상징들을 꺼내기 시작한다면 이 거리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 장소로 세상에 재등장하게 될까?
내가 묵고 있는 숙소는 이 지역의 건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작은 건물에다 딱히 인상적이지 않아서 그럭저럭 머물기 좋은 내부시설을 가지고 있다.
리셉션의 스탭과 조식을 담당하는 레스토랑의 스탭이 이 건물을 주로 관리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젊은 여성들의 모습이 아마도 이 지역의 미래 모습으로 보인다. 꼿꼿한 어깨와 허리로 바르게 서서 한없이 또렷한 눈빛에 미소를 머금은 얼굴 표정, 그리고 빠져서는 안 되는 활기 있는 걸음걸이까지.
어제 체크인을 하고 방에 짐을 두고 외출했다 돌아온 다음에 방 문이 열리지 않았다. 터치식 카드키를 아무리 문에 대보아도 문 손잡이는 꼼짝을 안 했다. 오른쪽 구석에 작고 빨간 램프가 켜진 것을 보고 리셉션에 내려가서 도움을 청했다. 카드키를 컴퓨터 시스템에 몇 번 넣어보던 그녀가 방 문에 켜져 있는 불이 무슨 색이냐 물었다. '그린? 오렌지?'
나는 '레드'라고 말했다.
'아!' 그녀가 말했다. '배터리가 다 된 것 같아. 내가 올라가 봐야겠어'
내가 리프트 쪽으로 걸음을 옮겨서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고 위에 있던 리프트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서랍에서 무언가를 찾던 그녀가 단정한 자세로 또박또박 걸어와서 나와 함께 리프트를 탔다.
내 방문 앞의 빨간 버튼을 보면서 '배터리가 다 된 게 맞아' 말하며 뒷짐 진 손에서 그녀는 드라이버를 펼쳤고 잠시 무릎을 숙여서 덮개를 열고 주머니에서 새 배터리를 꺼내 교체한 다음 말쑥하게 일어나 올라올 때와 마찬가지로 뒷짐을 지며 다 되었다고 말했다.
내가 문을 제대로 여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는 미소 지으며 내려갔다.
리셉션과 연결된 문 옆으로 작은 식당이 있다. 점심시간 이후로는 폴란드스타일 피자와 간단한 이탈리아 음식을 만드는 식당이 되는데 이 호텔의 조식 장소이기도 하다. 호텔 스탭과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이 아바풍의 노래와, 그것과 같은 비트의 레게뮤직이 흐르는 공간에 조금 격식이 있는 조식뷔페를 준비해 놓고 통통 튀는 발성과 미소로 객실 손님의 방 번호를 확인하며 자리를 안내한다.
30년 전 저마다의 일터에서 나름의 열정으로 꿈을 다져가던 나와 내 친구들의 모습이었다.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모르고 가는 길이었지만 그리고 힘은 들었지만 매 순간순간 재미있고 활기가 넘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어쩐지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그런 표정과 태도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소폿의 해안가 산책길에서 보이던, 끝을 알기에 가지 않았던 길을 보는 그런 사람처럼 되어버려서.
'아직 네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 있는데 와 주면 안 되겠느냐?' 묻는 분들에게 내 답이 거절이었던 이유였다.
이미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아이를 대하면 아이에게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미래를 주는 거라서요. 아무것도 모르지만 모르기 때문에 활기로 가득 찬 일상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사람을 하나 꼽으라면 제일 먼저 '나'를 꼽아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