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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 지 Apr 07. 2023

봄날이 간다

비가 잠시 그친 오전에 얼른 작은 밭에 나가서 아스파라거스와 도라지를 옮겨 심었다.

작년에 씨앗을 뿌렸고 싹이 텄고 쑥쑥 키를 올리다가 겨울이 되면서 마른 가지만 남기고 있던 아이들이었기에 땅 속에 남아있는 식물의 뿌리 같은 것이 있기는 할까 싶은 마음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물을 듬뿍 머금은 사질토양은 몇 번의 삽질과 호미질로 흩어지면서 품고 있던 뿌리들을 내어놓았다.

싹을 살짝 올리고 있는 도라지, 연하디 연해서 똑 부러지고야 마는 줄기를 올리는 아스파라거스 종근을 간격 맞춰 옮겨 심으며 한없이 신기했다. 빈 땅에 뿌렸던 티끌만한 씨앗들이 정말로 익숙한 그 모습 대로 나타나고 있었으니, 뿌린 대로 보여주는 정직한 땅의 신뢰로움에 그저 감탄할 일 밖에는 없는 순간이었다.

'남편의 손을 빌리지 않기'가 안말 생활의 목표이긴 하지만 살구나무 가지치기는 도와달라고 해야 하는 목록 중 하나가 되었다. 2월 즈음에 한다는 가지치기 시기를 놓쳤으니 여름까지 기다려보려 했으나 삐죽삐죽 전깃줄을 향해 길게 올라가는 가지들과 그 사이로 무성한 잎들이 나오기 전에 잘라내는 것이 나을 듯싶어서였다. 맛있는 살구를 포기해야 하는 건 조금 섭섭한 일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곳 산 밑자락에 틀림없이 찾아올 꽃샘추위는 가지치기를 하던 하지 않던 이 살구나무에 냉해를 입혀서 작년처럼 아주 적은 수확량만 주게 될 것이므로 미련 두지 말고 처음 해 보는 가지치기에 도전을 했다. 

조금 힘들게 그리고 많이 어설픈 모양으로 가지를 쳐냈다. 내년엔 조금 능숙해지겠지.


그리고 또 한참을 걸려서 쑥 뿌리를 걷어낸 자리에 돌나물과 좀씀바귀와 하설초 같은 키 작은 지피식물들을 옮겨 심었다.

큰 집이 아니어서, 넓은 밭이 아니어서 조금만 일하고 한참 들여다보고 한나절을 빈둥거릴 수가 있다. 파밍도 아니고 가드닝도 아닌 흙장난을 하면서 밥 먹으러 오는 고양이들과 눈인사를 하고 간이의자에 앉아 해받이를 하다 보면 서너 시간이 훌쩍 가고 있다.


지난 주말 아버지는  밭에서 겨울을 난 성요한풀과 모닝라이트 그라스를 힘들게 뽑아내셨다. 작년 가을에 보았던 노란색 꽃과 빗물을 막아주던 그라스의 용도는 이미 잊으신 듯했다.

난 뽑힌 화초들을 포기나누기 해서 새 자리에 옮겨 심었고 언니는 잡초를 놓아두고 화초를 뽑아내시느라 애만 쓰셨다고 아버지를 놀렸다. 그게 '허브'라는 화초라고 언니는 말했다. 아버지는 '냄새'가 나서 뽑았다고 말씀하셨다.


집에 오르는 계단에 태양광 줄램프를 감아두었는데 풀 정리를 하시던 아버지가 태양전지에 연결된 전선을 실수로 싹둑 잘라버렸다고 미안해하셨다. 그게 별로 비싼 것도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렸다.


새벽 산책길에 만난 동네 어르신에게 '우리 딸이 권고사직하고 여기에 작은 전원주택 하나 사놓고 주말마다 내려온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자랑하셨다

 

'아버지, 권고사직은 짤린 거예요, 짤린 거! 내가 한 건 명예퇴직!'

아버지는 슬며시 민망해하시다가 그냥 하하하 웃으셨다. 우리도 그저 깔깔깔 웃었다.


평생을 그렇게 사셨다. 낮은 자리에서 딱히 내세울 것 없이. 그러니 많은 날을 비워두는 집을 가진 딸 이야기를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랑처럼 하고 계신다.

아버지가 자랑하시는 말씀 속의 비유와 단위와 단어가 많이 달라서 당황스러운 순간들도 없지는 않으므로 화들짝 놀랄 때면 오래지 않은 지난 시간들이 불쑥 떠오르곤 한다.

 

'시어머니가 조금 억울하시겠네. 지금이었다면 조금쯤은 시어머니를 이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엄마는 내 목소리를 듣고 싶은데 전화통화를 할 수가 없다며 언니에게 하소연을 하고 계신다고 다. 언제부턴가 엄마는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못하시게 되었다. 전화벨 소리와 전화받는 일을 연결시키지 못하시는 것 같다.

엄마가 전화를 걸어오셔야만 통화를 할 수 있었는데 이젠 전화번호를 찾아서 내게 전화를 하시는 일도 못하시게 되었다고 언니가 말했다.

병원에서 면회를 하면서 부둥켜안고 울었던 가까운 기억도 엄마는 잊으셨다.


우리 작은 딸이 외국으로 봉사여행을 갔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고 계신다고 가끔 엄마 소식을 듣는다.


이틀 동안 내린 비로 벚꽃이 지면서 벚나무 아래 주차된 차 위로 꽃잎이 쌓였다.


비 오는 봄날. 아직은 보이지 않는 열매를 준비하느라 분주히 낙화한 꽃잎들을 차창과 지붕에 그대로 두고 생일을 맞은 아들과 저녁식사를 위해 고속도로를 달렸다.


봄날이 간다.


여린 햇살 틈에 하늘하늘 초속 5센티미터로 꽃이 질 때도.

비바람에 철썩철썩 사정없이 바닥에 흩어지며 꽃이 질 때도.


아직 어떤 열매를 준비할지 결정 못하고 흩날리는 기억들의 꽃잎처럼.

뿌려진 씨앗들을 약속대로 키워내는 땅 속의 생명의 온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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