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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 지 Apr 23. 2023

저마다의 진심

화창한 토요일이었다.

봄나들이 차량이 몰리는 이름난 관광지를 피해서 한적한 카페를 찾았다.

벌레도 아직 없는 데다가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 신록과 꽃과 하늘이 한데 어우러진 야외공간에 설치된 캠핑텐트에서 게으른 봄날 한 때를 보냈다.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은 카페라서 텐트도 캠핑가구도 깨끗한 새것이어서 좋았다.


삶의 모든 순간들이 오늘만 같다면 더 없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친구가 해 준 말이 마음을 막곤 한다.


'날이 매일 맑기만 하면 땅은 사막이 된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신경림 시인의 싯귀절은 덤이다.

 



전날 오전에 나는 그리 오래지 않은 사건으로 시시비비를 가리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 내게 묻고 싶은 내용이 있다는 검찰청 조사관과 전화 한 통화를 해 줄 수 있는지 묻는 전화를 받았다. 내 전화번호를 그분에게 알려주어도 된다고 말하자 그는 내가 받게 될 검찰청 전화번호의 앞자리를 알려주었다.

몇 시간 뒤 그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고 아마도 조사관일 듯 한 통화 상대방이 무척 곤혹스러워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피싱이 아니라 정말로 검찰청의 전화를 받게 된 내 마음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사전에 내용을 충분히 전달받았으니 필요한 말씀을 하시라고 말을 하면서 질문을 기다렸다.


별 것이 아닌 내용의 사실관계 확인을 하는 것으로 통화를 마무리하면서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중대한 범죄까지는 아닌 데다가 어쩌면 저마다의 진심이 낳은 충돌이기도 할 부분들도 있는지라 피해자의 마음도 가해자의 마음도 조금씩은 가늠이 되고, 또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상처밖에 남는 것이 없게 될 아까운 두 사람의 건강한 시간들이 그토록 거친 구김을 남기며 흘러가고 있는 것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한 사람이 되어야 했으므로.


십여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1학년 남자아이의 입학 상담을 온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말했다.

'눈물 흘리지 않게 해 드릴게요!라는 말은 못 해 드려요. 아무래도 장애를 가진 아이가 학교생활을 하다 보면 의도하지 않던 일들 때문에 서로 당황스러운 일들이 많이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억울한 일도 생기곤 하거든요. 일이 생기면 최선을 다해서 해결해 보겠지만 겪어나가는 과정 하나하나가 아주 많이 힘들어요.'


책과 장난감은 색깔과 모양과 순서에 맞게 잘 정리정돈 되어있어야 하고, 하루의 일과는 마음속에 여러 번 입력해 놓은 순서에 맞게 흘러가야 마음이 놓이는 그 아이에게 수시로 변하는 학교에서의 일상은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 되곤 했다. 공사중인 등교길, 어제와 다른 급식 메뉴, 갑자기 바뀐 시간표, 예정에 없던 운동회 연습, 부모님 초청 수업, 학예발표회같은 크고 작은 행사때마다 몸살을 앓는 듯 힘들어해서 문제가 생기곤 했다.


힘들게 '학교'의 일상을 받아들인 1학년을 보낸 뒤 드디어 아이는 본래부터 아이의 것이었던 순수하고 선량한 본모습을 이제는 예측 가능하게 된 '가끔 변하기도 하는 학교의 일상' 속에서 잘 유지할 수 있게 되었기때문에  2학년을 보내는 동안 제법 많은 친구들이 생겼었다.

그러나 3학년이 되자마자 다른 아이들의 세계는 그야말로 폭발하듯 커지기 시작했고 폭풍성장하는  친구들의 세계관에 따라 들어갈 수 없게 된 아이는 그저 '도움'이 필요한 아이로 인식되어 갔다.


특수반에서 국어, 수학 공부를 하고 3학년 교실로 가면 담임선생님이 반 아이들을 부르며 친절하게 말씀하셨다.


'여러분, 00 이가 교실로 왔어요. 선생님이 뭐라고 했지요? 낮은 사람들에게는 친절하게 대해야 해요. 00 이가 자기 자리에 앉아서 다음 수업시간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모두들 잘 도와주세요!'

 

그분은 가끔 나에게 소소한 선물을 주시면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었다.

'선생님, 낮은 사람에게는 항상 먼저 챙겨서 드려야 하는 거지요. 자, 이거, 선생님 거예요. 제가 제일 먼저 챙겨두었어요!'


학교에는 동화 같은 때 묻지 않은 세계관을 가진 선생님들도 가끔 있으므로 나는 그 말에 미소로 응대를 할 수 있었지만 늘 걱정스러운 것은 아이였다. 그 이야기를 매일매일 듣는 나의 아이와 그 반의 모든 아이들이 모두 다 걱정스러웠다.


사람들은 모두가 저마다의 진심을 다 해서 선량하게 상대를 대한다.


그런데 그 저마다의 진심이 상대를 아프게 하고 상처받게 한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엄청나게 힘든 과정을 겪으며 깨달아가게 된다. 

아이는 온몸으로 부대끼며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는 시간으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저마다의 선량함, 저마다의 진심으로 인해서 아이도 아이의 엄마도 많이 울었다.




선량한 저마다의 진심으로 인해서 거칠게 굴곡진 삶의 시간들을 만나게 되겠지만 기어이 잘 이겨내기를. 그리고 매 순간 그런 고비마다 단꿈을 꾸는 화창한 봄날의 쉼을 만나게 되기를.


게으르게 보내는 봄날의 마음 무거운 상념이었다.


장애인의 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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