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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 지 May 27. 2023

설렁탕 한 그릇


어릴 때 잘 못 먹던 식재료 중 하나가 파였다. 그래서 내 몫의 국그릇에 든 파는 엄마가 건져주셨다. 어린 마음에 늘 지성으로 내 국그릇의 파를 하나하나 건져내 주시는 엄마에게 고마운 마음이 드는 한편으로는 내 몫으로 파 없는 국을 떠 주는 건 어려운 일인가? 싶은 궁금증도 있기는 했었다. 엄마에게 그걸 묻지는 않았다. 하나하나 파를 건져내 주시던 내 국그릇의 엄마 손이, 엄마의 젓가락과 숟가락이 밥 먹을 때면 뭉클한 기억으로 떠오르곤 한다.


'나이 먹을수록 양념 한 가지씩 먹을 수 있는 게 늘어난다!'

엄마는 그렇게 말씀해 주셨다.

나이 서른 살이 넘어 알리올리 파스타를 먹으며 잘 못 먹던 마늘을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되었고, 파를 정말로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된 것도 그야말로 최근에 들어서다.



'혼자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으면 결혼 안 하고 혼자 사는 것도 가능하대!'


임용시험을 준비하던 동기들이 수다를 떨다가 '왜 여자는 꼭 결혼을 해야 하는지? 결혼 안 하고 혼자 살 수는 없는 건지?' 하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한 친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렇게 말했었다.


여자 혼자서 오전에 식당에 들어가면 눈총을 받는 일은 각오를 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물론 오전이든 오후든 여자 혼자서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면 자주 낯설거나 험한 시선을 감수해야 했었다.

버스비를 내려면 꼭 동전이 필요했던 시절. 가게에서 동전을 바꾸기 위해 지폐를 내며 껌 한 통을 사려다 욕을 바가지로 돌아 나오는 일도 있었.

개시손님이 여자라면. 거기다가 안경까지 썼다면 하루 장사 문을 닫아야 한다는 미신이 만연했던 때였으니까.


체하고 회복할 때 제대로 된 한 끼 식사를 하라며 선생님께서 사 주셨던 것도 설렁탕이었다.


90년 문을 열었다는 번화한 쇼핑몰의 설렁탕 식당에 들어와서 일인 테이블에 앉으니 동남아 학생이 서툰 발음으로 주문을 받으러 왔다. 

'계산은 선불로 해야 하나요?' 물으며 그와 눈이 마주친 나는 어쩌면 내 말을 못알아들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 얼른 메뉴판에 적힌 내 메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설렁탕 하나요!' 그는 여전히 발음은 서툴지만  내가 하는 말을 벌써 이해했다는 자신 가득한 눈빛으로 능숙하게 테이블을 세팅해 주고 주방을 향해 말했다.


가위, 섞박지, 썬 파가 담긴 그릇,  앞접시. 물컵, 물병, 양념통. 일인 테이블에 군더더기 없이 세팅된 집기류들.


설렁탕 한 그릇 앞에서 무척 많은 시간들이, 사연들이, 사람들이 떠오르다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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