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두 해 전이었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철거민들이 모여 이룬 마을에 정착을 했다.
“먹고살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고물상을 차렸어. 여기저기 갈 곳 없는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빈 병, 고철, 집안에 몇 대를 내려오던 책들, 숟가락, 젓가락, 화로, 녹슨 호미 같은 것들을 주워 오는 아이들에게 니 엄마가 끼니를 챙겨주기 시작했다. 멀겋게 끓인 김칫국에 찬밥 한 덩이를 넣어 풀죽을 끓이는 게 전부였는데도 갈 데 없는 아이들이 늘상 모여들었지. 우리가 이사를 온 다음에도 우리 집에 드나들던 철수랑 원배 너도 기억하지?”
철수 오빠와 원배 오빠는 새 집을 지어 이사 온 우리 집에도 몇 번을 다녀갔던 기억이 난다. 흰색 셔츠와 잿빛 바지를 입고 있던 철수오빠의 흰 얼굴과 곱슬머리, 체크무늬 남방에 감색의 바지를 입고 있던 상고머리의 원배 오빠. 그 얼굴을 전부 다 기억할 수는 없어서 실루엣과 미소 짓던 입술까지만 떠올리고는 하지만, 해가 어스름 지는 초여름 밤 선선한 바깥바람이 부는 날에는 어김없이 그날 두 사람의 서 있던 모양과 우리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맴돌고는 한다.
“이리 와라, 내 서울 구경 시켜 주지!”
그 기억 속에서 아마도 원배 오빠가 작은 키의 나를 보며 허리를 숙이고 그 미소 띤 입술로 장난스럽게 말을 하고 있다.
“서울 구경? 와! 진짜? 진짜?”
원배 오빠는 무슨 말인지 뜻도 모를 제안에 신나 하면서 폴짝폴짝 뛰는 내 양팔을 슬며시 잡아당겨서 뒤돌아 세우고는 그의 양 손바닥을 내 양쪽 귀에 딱 붙이고 불끈 힘을 주면서 위로 당기려는 듯했다. 그렇게 예정에도 없이 귀가 공중에서 위쪽을 향해 당겨지는가 싶은 느낌이 순식간에 지나면서 거의 무중력의 상태로 공중에 떠올려진 내 눈앞의 장면은 벽돌 담벼락에서 갑자기 하늘과 산과 앞마을의 풍경으로 바뀌어있었다.
힘들이지 않으면서 내 몸을 번쩍 들어 올렸던, 어린 내 귀를 양옆에서 누르던 그 손아귀의 힘을, 순식간에 껑충하고 공중으로 들어 올려지던 축 쳐진 내 양팔과 양다리의 무저항적인 움직임을, 주변에서 까르르 웃던 웃음소리를, 그리고 원배 오빠의 어깨보다도 높은 곳까지 들리워져서 보여지던 담장 너머 먼 바깥의 푸르스름하던 산과 산들 사이의 하늘과 나무들의 기억들이 그 여름날 초저녁의 바람결에 섞여서 어스름한 기억들을 살랑살랑 흔들고는 하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가까운 어제처럼 기억이 나는, 가벼운 미소가 나오는 그 여름 해 질 녘의 어스름 시간들은 월남전에 가서 명을 달리하고 말았다는 철수 오빠와 그 소식을 슬프게 전해주던 원배 오빠가 얼마 지나지 않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까지 한데 뒤섞여져서는 잔잔하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한 기억이 되었다.
상처를 받았고, 살아남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내게 기억하고 추억할 것들 한 줌을 그렇게 초여름 한 철, 한 순간의 선선한 바람 속에 슬쩍 풀어주었다가 휘리릭 사라져 버리고는 한다. 그러니 나는 영 그 오빠들의 기억을 놓지 못하는 초여름 어스름 저녁의 선선한 바람이 부는 순간을 보내곤 한다. 기억할 한 순간의 바람이면 족하다는 듯 그 기억은 원배 오빠가 시켜 준 ' 서울 구경‘의 장면을 떠올리며 미소 짓는 마무리를 한 뒤에 다시 또 한 해를 기억 속에 감추고 시간을 보낸다. 내년 여름 이맘때 이맘 시간 즈음의 선선한 바람을 기약하면서.
상처받았지만 살아남은 사람이 되어 쓰는 개인의 이야기들이 모여 역사를 이룬다.
오빠들의 역사는 짧았다.
내 엄마와 아버지의 역사는 구십 년이 되어가는 이 시점에도 진행형이다.
대를 달리해서 나의 아이들까지도 앞으로도 백 년은 이어져가게 될 이야기들의 한가운데에 내가 서있다.
도시괴담...
철거민들의 지역 괴담이 숱하게 떠도는 도시였다.
먹을 것이 없어서 자식을 삶아 먹었다는 이웃의 이웃 이야기가 흉흉했고,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과부의 집에는 시신이 운구되기도 전부터 이웃 남정네들의 거친 발이 드나든다는 소문이 흉흉했다. 납치된 여고생이 공원에 피투성이가 된 채로 버려졌다는 소문도 공포스러웠고 시장바구니를 들고 극장 뒤편의 댄스홀을 드나드는 아낙네들의 뒷머리를 향한 손가락질과 함께 나오는 말들도 흉흉했다.
이미 몸으로 전쟁을 겪은 정장년 세대를 웃어른으로 모시고 있던 청년의 내 부모님들과 소년의 우리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뒤엉켜 혼돈스러운 시간을 보내던 혼돈스러운 지역이었다.
따뜻하고 훈훈했던 이야기들도 물론 많았지만 그 따뜻함과 훈훈함의 배경으로는 필수적으로 흉흉한 사정들이 깔려있었다.
중학생 때의 어느 여름날, 이미 장마가 무더위와 함께 무르익었던 초저녁 외출 길에서 비를 만난 엄마와 나는 급하게 지나는 택시를 세워서 타고 집으로 향했다. 주황색이었는지 초록색이었는지 하는 택시의 뒷좌석에 앉은 뒤 엄마는 운전기사의 뒷모습을 향해 목적지를 말했다. 그 운전기사는 잠시 말이 없이 운전대를 잡았는데 곧 그의 옆쪽에 있는 백미러를 통해 창백한 낯빛의 얼굴로 우리를 노려보면서 목적지로 향하는 내내 생기 없는 단조로운 억양으로 줄곧 욕설이 섞인 어떤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중얼중얼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는 듯하는 그의 말은 너무나 또렷하게 우리 귀에 들어왔다.
“내가 말야, 월남전에 갔다 왔다고. 거기서 우리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엄마고 딸이고 가리지 않았어. 내가 말이야. 씨* 니들 같은 것들 말이야...”
그 운전기사가 나지막하고 단조로운 억양으로 내뱉는 말들이 하나같이 기이한 단어였기에 생전 처음 들어보는 낯선 단어들을 하나하나 귀 기울여 들으며 시선을 백미러에 고정시키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엄마를 보았을 때, 나는 또 놀라고 말았다.
엄마는 백지장같이 하얘진 얼굴로 눈을 부릅뜬 채 두 손을 가슴 앞으로 오므려서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택시를 세우고,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여건 같은 건 절대로 없던 시절이었으니 우린 조용히 택시 기사가 우리 목적지에 차를 세우고 우리를 온전히 내려준 것에 그저 안도할 뿐이었다.
거스름돈 몇 십원 정도는 받지 않은 채 허겁지겁 차에서 내린 엄마가 내 손을 잡고 서둘러 걸으면서 혼잣말을 했다.
”참 이상한 사람이구나!"
그렇게 소름 끼치는 순간을 보내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그 택시 기사의 말 중에 ‘쑤신다’는 말의 의미를 여러 번 생각해야 했는데 도무지 뜻을 알 길이 없었다. 그날 그 순간의 공포스러움보다도 사람을 향해 ‘쑤신다’는 말을 언제, 어떻게 쓸 수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으니 그저 기이할 뿐이었다.
나중에 상담 공부를 하면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 라고 하는 단어를 접하게 되었다.
바로 그것이었다.
그 택시기사.
월남전에서 살아 돌아온 그 택시기사.
그리고 그 많은 참전 용사들.
그들이 평생을 붙잡고 한없이 고통스러워하며 살아왔을 기억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이 겪은 일들에 대한 한 두 마디의 말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소년의 때에 이미 몸으로 겪어낸 내 엄마와 아버지의 공포와 좌절들에 대해서.
그리해서 나는 그날 이후로 여름날 초저녁 선선한 바람 속에서는 늘 월남전에서 세상을 달리 한 철수 오빠의 이야기를 듣고는 했던 것이었다.
살아남지 않은 사람이었던 철수 오빠. 그리고 대학시절의 J언니.
카뮈가 그의 저서 ‘결혼, 여름’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 낭만이 아닌, 그럼에도 살아내야 하는 존재에 대한 사색이었다는 것을.
상처를 받고 기어이 살아남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진 생존 유전자들에 대해 생각해보고는 하는 것이었다.
근거 없는 믿음. 미신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