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스퍼거 종단 연구 보고서 (1)

by 미 지

어느 한낮에 우리 부부는 TV의 역사 스토리텔링쇼가 스트리밍 되고 있는 거실에 앉아서 각자의 일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TV 속에서 강의 진행자가 그날의 인물을 소개하면서 질문을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유자광은 조선 시대 여섯 임금의 신망을 받던 사람이었지만 신분의 약점이 있었다. 얼 자였기 때문이다. 얼자란 양반인 아버지와 노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을 말한다. 양반인 아버지와 양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은 서자라고 한다. 서자와 얼자, 두 신분을 하나로 부르는 말이 있다. 무엇인지 아는가?"

“서얼. 서얼이잖아.”

인터넷으로 바둑을 두고 있던 남편은 자신이 아주 흥미로워하는 조선 시대의 이야기가 나오자 귀를 쫑긋 세우면서 TV를 보기 시작했다.

“가만있자. 유자광... 유자광이란 말이지...”

그가 바둑을 두던 컴퓨터로 유자광에 대해서 검색을 시작했다.

“엥? 이게 뭐야? 유자광이 노비 출신이라고? 조선 시대에 유자광이 여러 명이 있었나?”

소파를 등에 기대고 앉아 뜨개질을 하던 내가 잠시 당황스러워졌으므로 그를 보며 말했다.

“지금 TV에서 유자광 엄마가 노비라고 말했잖아. 당신이 서얼이라고 답도 맞췄잖아.”

“아니, 여기는 유자광이 노비 출신이래. 조선시대에 유자광이 여러 명이 있었나 보다.”

“당신이 답도 맞췄잖아. 양인 출신 서자, 노비 출신 얼자를 합해서 서얼이라고 한다고.”

“아니, 나는 두 글자를 합한 걸 말 한 거지. 아무튼 내가 지금 찾은 유자광은 노비 출신이라니까 저 강사가 말하는 사람은 아닌 거 같다!”




아들의 대학 졸업식이 있던 날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가를 돌면서 메뉴를 정하고 있었다.


아들이 한 식당 문 앞에 멈추어 서서 말했다.

“우리 이 식당에서 밥 먹을까요? 아빠는 아무래도 한식이 좋겠지? 여기, 뷔페로 음식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샤브샤브 먹으면서 각자 먹고 싶은 음식을 가져다 먹으면 되니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래, 나도 좋은 거 같아. 여기 문 앞에 선결제라고 쓰여 있네. 요즘은 이런 뷔페식당도 선결제하고 들어가는가 보다. 해물은 아들이 별로 안 좋아하니까 쇠고기 샤브샤브 먹으면 되겠지?” 하고 나는 조금 신이 나서 말했다.


문을 열고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입구에서 응대하는 직원이 인사를 하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세분이세요? 저희는 선결제를 하고 있어요. 여기서 드실 메뉴를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쇠고기 샤브샤브로 할게요” 하고 내가 말했다.

“월남쌈 이용료는 따로 받고 있습니다. 월남쌈도 이용하시겠습니까?” 직원이 다시 물었다.

“아니요, 월남쌈은 안 해도 됩니다”

아들이 대답했다.

“네....”

하고 직원이 답을 하며 잠시 기다리다가 다시 물었다.

“카드로 계산하시나요?”

아들과 나, 직원의 시선이 남편을 향했고, 그 자리에 서서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남편이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아, 선불이에요?”

“.... 네.... 선불입니다..."

직원이 말하자 남편이 허둥지둥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카드를 찾아 직원에게 건넸다.

"세 분 결제했습니다. 44번 자리로 가시면 됩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서 44번 자리로 가는 동안 아들이 의아한 눈빛을 하고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엄마, 아빠한테 선결제라고 문 앞에서 말했잖아. 문에도 쓰여 있었고 들어왔을 때도 직원이 선결제라고 했잖아!”


아들이 이런 장면을 보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동안 집안에서 종종 보여지던 엄마와 아빠의 언쟁 그저 아빠가 엄마에게 불만이 많아서 엄마 말을 무시하는 거였고, 그것 때문에 화가 난 엄마가 아빠에게 잔소리를 퍼붓는 것 정도라고 아들은 생각해 왔을 터였다.


선결제와 선불이라는 단어를 다른 말이라고 구분 지어 생각하는 대졸 출신의 공기업 직원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신의 '아빠'라는 것을 이제 아들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었다.


천천히 나는 말했다. 유자광의 신분에 대해 설명하는 TV프로그램을 보며 서얼 출신이라는 답을 척척 말하다가 유자광이 노비 출신이라고 나와 있는 인터넷 검색 페이지를 보고는 이 사람은 다른 유자광이라고 말하는 공기업 직원인 그 아이의 아빠에 대해서.




얇은 종이 한 장에 알고 있는 정보 하나씩을 입력해서 파일을 생성해서는 잘 저장해두고 있으니 기억력은 아주 좋은 편이다. 단답형의 질문에 정확한 답을 하고는 하지만 알고 있는 정보들을 하나씩 꺼내서 이미 알고 있는 대상과 일치시키는 정보 처리 과정이 심각하게 느리거나 불가능하다는 것이 늘 문제다.


48장으로 이루어진 화투패나 52장의 트럼프 카드로 하는 다양한 화투 놀이나 카드 게임은 정확하게 변수를 조합해서 게임을 한다. 아주 잘한다. 젊은 시절을 노름판에서 지냈던 친정아버지가 그와 고스톱을 칠 때면 혀를 내두르며 감탄을 할 정도다.


땅과 바다의 면적, 인구수, 통계 수치, 월급, 환율, 예적금과 대출이율계산 같은 것들도 계산기가 필요 없을 정도로 척척 잘한다.

그렇게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모든 변수들을 척척 계산하고 통제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한 곳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사람이 대학을 졸업하고 여러 사람들과의 소통이 필수적인 공기업에서 억대 연봉을 받으며 정년퇴직을 할 때 까지 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던 나에게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남편과 아들과 나, 셋이서 함께 앉아 점심 식사

를 하면서 나는 그런 이야기를 아들에게 했다.

아들과 나의 그 모든 대화 내용을 들으면서 남편은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그가 이런 자리에서 나누는 대화의 내용을 귀담아듣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대화의 주제가 본인에 대한 이야기임이 분명함에도 그는 어떤 내용에도 스스로의 귀와 마음을 담지 않고 흘려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남편 명의로 되어있는 오피스텔에서 몇 달 전 누수 문제가 생긴 일이 있었다. 아래층 주방에 물이 떨어져서 싱크대에 변색이 생겼으니 변상을 해 주어야 한다고 관리실 직원이 방문을 했다고 거기에 살고 있는 아들이 전화를 했다. 물이 떨어지는 경로를 확인하느라 공용 부분의 소화전 방수구를 열어보니 수도꼭지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고 했다. 바닥은 흥건하게 적셔진 채 몇 달 동안인지 모를 누수의 흔적을 현재 진행형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공용 부문의 누수가 진행되고 있는데 윗 집이라는 이유로 우리가 아래층의 누수 관련 수리비를 지불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했지만 관리실에서는 공용부문의 누수된 물이 아래층으로 떨어질 수가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위층에 사는 우리가 변상을 해야 한다고 했다. 관리실에서 요구하는 대로 아래층의 공사비를 지불해 주고 외벽과 연결된 아들 방 욕실에 방수 공사를 해 주고 마무리를 했는데 그 후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 동일한 문제가 생기고 있다며 관리실에서 또 연락이 왔다고 남편이 내게 말했다.

“아들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 아래층에 또 물이 샌다고 연락이 왔어. 지난번 하고 똑같은 자리에 물이 맺힌다고, 아들이 욕실에서 쓴 물이 바깥에 있는 벽으로 스며들어서 고여있다가 아래층으로 떨어지는 거래”

“세 달 전에 외벽 수도관에 누수가 생겼을 때랑 같은 상황이네. 그때 우리가 아래층 싱크대 수리비를 물어줬잖아. 관리실에서 관리를 못해서 수도관 누수가 된 것 아니냐고 물었을 때, 높이 차이가 있기 때문에 물이 그쪽으로 흘러가는 일은 절대로 없다고 했다면서? 공용 부문에 누수가 생기기는 했지만, 그리고 그것 때문에 벽체에 물이 고여있기는 했지만 그 고인 물이 높은 쪽으로 갈 턱이 없으니 아래층으로 흘러 내려간 물은 그 물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가 수리비를 낸 거잖아. 그러더니 이번엔 아들이 욕실에서 쓰는 물이 바로 그 공용 부문의 수도관을 타고 다시 벽체로 흘러 나가 고여서, 단차 때문에 절대로 흘러 들어갈 일이 없다는 그 높은 자리를 지나가서 아래층으로 떨어지고 있으니 그것도 다시 우리 책임이라고 한다고? 똑같은 자리에서 생긴 일인데, 자기들이 관리를 못해서 몇 달 동안 누수가 되던 물이 아래층으로 흘러 내려가지 않았다고 우리 책임으로 처리하더니 이번에는 우리가 쓰는 욕실에서 혹시 흘러나갔을지도 모르는 물이 그 높이를 통과해서 아래층으로 흘러 내려갔으니 또다시 책임지라고 한다는 걸 그냥 물어주기로 했다고?”

“아니, 나는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어.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그 사람 말은 이쪽 바닥보다 옆 쪽 바닥이 더 높기 때문에 물이 그쪽으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말했어.”

우리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들이 크게 뜬 눈으로 아빠를 보며 말했다.

"아빠, 엄마 말이 바로 그 말이에요. 그때 직원이 외벽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누수가 생기기는 했지만 벽의 설계구조상 아래층 라인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높으니 그 단차 때문에 누수된 물이 아래층으로 흘러가지는 않는다고 말했는데 그때 아빠가 그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아래층으로 연결되는 바닥면이 이쪽 바닥면보다 높아서 물이 그쪽으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한 거였어요. 그런데 이번에도 똑같은 자리에서 누수가 생기고 있는 것 같다면서 그 직원이 누수된 수도는 이미 조치를 했으며 이번에도 제 방 욕조에서 흘러나왔을지 모르는 물이 아래층으로 연결되는 높은 쪽 통로를 통과해서 누수를 발생시키고 있는 거라고 말을 하기 때문에 제가 그건 말이 안된다고 했더니 아빠한테 전화를 한 거구요."


남편은 관리소장이 자기와 통화하면서 어차피 입주민들이 관리비를 내는 것이라면서 소유자인 남편이 공사비를 내는 것이 맞다는 말을 하면서 우리가 공용부문 누수라고 주장한다면 누수탐지 업체를 불러서 조사 해 본 다음에 누수 원인이 관리실에 있지 않다는 결론이 난다면 몇 백만 원이 되는 누수 탐지 비용을 남편이 지불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고도 했다.

말을 멈춘 채 흔들리는 눈빛으로 서 있는 아빠를 보면서 아들이 천천히 말했다.

"제가 다시 관리실에 찾아가서 이야기해 볼게요!"


나는 아들에게 관리실에 가서 누수 흔적은 집 안에 이는 것이 아니라 집 바깥쪽 공용부문에 있으며, 공용부문의 누수가 오랫동안 계속되었기 때문에 방수층이 깨진 상태로 발생한 것 같으니 아래층의 누수 문제는 그때나 이번에나 명백하게 관리 부실로 발생한 문제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지난번에 우리가 지불했던 공사비를 돌려줄 것과 앞으로 아래층에 누수가 생기더라도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말 것을 약속받도록 했다. 여전히 아래층의 누수 문제를 우리 탓으로 돌린다면 지난번 누수되던 외벽 수도관의 장면이 담긴 영상자료를 첨부해서 고소든 고발이든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말도 꼭 하라고 덧붙이면서.


다음날 아들에게 연락이 왔다.

"엄마, 관리실에서 공용부문 하자가 맞으니까 지난번 아래층 공사비랑 내 방 욕실 방수 공사 비용이랑 다 같이 돌려주겠다고 했어요. "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18화기억을 잃은 사빈씨의 모든 말은 '속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