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성동면 병촌 성결교회 앞에는 일명 전우치나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조선 중종 때에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이곳저곳 도피생활을 하던 전우치가 자신이 들고 다니던 지팡이를 그 언덕에 꽂으면서 '이 지팡이가 싹을 틔워 자라면 전 씨가 번창할 것'이라 말하고 떠났는데 이후 그 지팡이에서 새싹과 잎이 돋고 키가 자라서 오늘날 충청남도의 기념물이 되었다고 한다.
치매가 말기로 접어들어 자식들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 되기까지 사빈씨는 틈만 나면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오라고 졸랐다. 한 달에 한 번씩 대형 포장 일회용 커피, 여러 봉지의 빵과 과자, 음료수와 과일 같은 것들을 보내면 사빈씨는 그날 저녁으로 그것들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는 했다. 시골 마을의 사람들이 반복되는 사빈씨의 통 큰 기부를 부담스러워해서 여러 번 만류하는 바람에 월중행사가 아니라 연중행사 정도로 횟수를 줄이기는 했다.
치매 진단을 받고 나서 요양병원에 입원 한 다음에는 만나는 사람들이 누구든 가리지 않고 자식들을 졸라서 받아낸 간식거리들을 건넸다. 간병사, 간호사, 의사, 물치리료사, 같은 방 환자, 옆 방 환자, 그 옆 방 환자, 문병을 온 타인의 가족들까지 오가다 만나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사빈씨는 손에 들고 있는 간식거리들을 건네곤 했다. 병원 환자들은 식단 조절이 필요한 경우도 많으니 간식거리를 나누어드리지 말라고 부탁을 드려야 했다.
요양병원 입원 후 삼 년 동안 사빈씨는 천천히, 그러나 한두 달 간격으로 비교해 볼 때는 아주 많은 차이가 나는 모양으로 기억을 닫았다. 오늘이 몇 월 몇일인지, 지금이 몇 시인지를 말하지 못하는 상태로 병원 생활을 시작한 사빈씨는 살던 마을과 마을 사람들에 관한 기억을 한 두 단계 이전의 것으로 되돌리고는 그때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가면서 현재의 기억들과 멀어져 갔다.
내가 대학생이 되던 즈음에 살던 집 이야기를 할 때, 역시 치매 때문에 부모님을 힘들게 하시던 외할머니 이야기가 나왔다. 면회를 갈 때마다 서 너해 씩 뒤로 돌아간 시절의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 듣는 낯선 이야기들이 나오는 날도 있었다. 아직 섬망이 심해지기 전이었으니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리라.
사빈씨는 남편이 하루하루 막노동을 하며 벌어온 돈을 알뜰살뜰 관리하며 규모 있게 살림살이를 하는 성품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크게 낭비벽이 있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은행에 적금이나 예금을 들어서 푼돈을 조금씩 모아서 목돈을 만드는 일 같은 것은 적성에 맞지 않는 편에 속했던 사빈씨는 한 동네에 사는 비슷한 연배의 친구들과 친목계와 반지계, 낙찰계 같은 것을 엮어서 순번에 따라 목돈을 타고 계원들과 식사를 하며 다달이 곗돈을 붓는 것이 유일한 금융활동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일에 최적화된 가정 경제 시스템이었다. 벌이를 담당하는 남편이 아프기라도 하면 당장 살림살이가 마비가 되곤 했으나 그런 것에 대한 대비책을 미리미리 세워두는 요령 같은 것도 없이 사빈씨는 하루하루를 살았다. 친목 계원들과 얼기설기 엮인 친목 관계를 이용해서 곗돈을 붓듯 일상을 이어나갔다. 크고 작은 사건과 사고로 한 계원의 집안에 생활비가 부족하면 농어촌 시절의 품앗이 같은 형태로 계원들끼리 돈을 빌려 주거 거나 일손을 거드는 등으로 집안의 대소사에 돌려 막기를 하듯 힘을 모으는 시스템이었다.
그 마을에 살던 때의 이야기를 사빈씨는 하기 시작했다.
건너 건넛집에 사는 만삭의 새댁이 돈을 벌러 집을 떠났다가 몇 날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아이들과 여러 날을 굶고 있더라는 말을 들은 날 사빈씨는 그니에게 쌀 한 되와 보리쌀 두 되를 가져다주었다고 했다.
쌀 한 되면 1.8킬로 정도다. 거기에 보리쌀 두 되 3.6킬로까지라면 대략 5킬로 정도의 양이 될 것이었다.
만삭의 그 새댁은 사빈씨가 가져다준 쌀을 무표정한 눈빛을 한 채로 냉큼 받더니 이렇다 저렇다 말 한마디 없이 부엌으로 들어가더라고 했다. 물을 받아둔 물통의 뚜껑을 열어서 그 쌀을 죄다 붓고 썩썩 씻어서는 밥솥에 밥물을 맞춰 붓고 연탄아궁이 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그 집 마당 한 켠에 자라고 있는 푸성귀를 재빠르게 쓱쓱 뜯어 씻어서는 된장 몇 숟가락을 넣어서 무쳤다. 오래 걸리지 않아 밥이 다 지어졌고 그니는 아이들을 방으로 불러 모아서 밥솥째로 상에 올리고는 밥을 먹기 시작했다. 사빈씨는 그 가족이 식사를 시작하는 것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고, 식구들과 저녁밥을 해 먹고 잠이 들었다가 다음날 동이 트기 전, 온 마을이 웅성거리는 소리로 골목을 돌며 사람들의 잠을 깨우기 직전의 시간에 그 새댁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 꿈에서는 전날 사빈씨가 가져다준 쌀을 보던 순간부터 무표정으로 무뚝뚝하던 그니가 세상 환한 웃음을 웃으며 사빈 씨를 불렀다.
"나, 이제 가네~ 자네가 가져다준 쌀 덕분에 정말 배부르게 먹고 가네. 고맙고, 고맙네. 복 받을 거야~ 잘 있어~ 나, 이제 가~"
그니의 뒷모습을 보며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 이보게~~ 여기 좀 봐!"
하고 소리를 치며 잠을 깬 사빈씨는 곧 밖에서 나는 심상치 않은 소리에 저절로 심장이 뛰어서 밖으로 나가 사연을 알아보았다.
새댁이 간밤에 약을 먹었다고 했다. 늦게 집에 돌아온 남편이 고통스러워하는 그니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병원에 업고 갔지만 이미 늦었다고 했다. 사빈 씨는 병원에 가서 죽어있는 그니의 모습을 보고 그만 주저앉아버렸다. 사지가 뒤틀려버린 채로 고통스럽게 죽어있는 모양을 그때는 병원에서도 사람들에게 가리지 않고 보여주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죽음이 그다지 새삼스럽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사빈씨는 어릴 적 학교길 동행 동무였던 이웃에 사는 길순이와 그 가족들의 주검도 처참한 상태 그대로 목격을 한 적이 있다. 일곱 살 나이에 본 그 처참한 죽음의 광경으로 받은 마음의 충격을 사빈씨는 극복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시절 그 마을의 사람들, 일가친척과 친구들은 다들 그렇게 눈앞에서 펼쳐진 날 것 그대로의 충격들을 평생 마음에 담고 살았다.
사빈씨는 그날 이후 길순이의 도시락을 빼앗아 먹으며 두들겨 패던 어린 시절의 자기 자신을 두고두고 용서하지 않은 채 평생 속죄하는 마음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남편과 불화하는 장면조차도 어쩌면 몇 개는 스스로 선택해서 그린 그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떠들썩하게 마을을 뒤덮어버리고는 하던 그 부부싸움 중 몇 번은 다분히 주기적이고 자발적인, 피할 수 있었으나 피하지 않고 오히려 부추켜서 일을 내 버린 일종의 이벤트였던 것도 같고.
사빈씨는 비가 오거나 선득선득 을씨년스러운 흐린 날을 견디기 힘들어했었다는 것을 오랜 세월 '엄마'로써의 사빈씨를 들여다보면서 알게 되기도 했다.
그리고 알뜰살뜰 생활을 꾸린다거나 자식들의 생활과 공부에 신경을 쓴다거나 일가친척들을 포함한 가족 구성원들과의 가정을 화목하고 풍요롭게 개선시켜나가고 싶어 하는 의지도 없었던 것 같았다.
한두 달 열심히 삶을 지키다 어떤 계기로든 한껏 남편의 심성을 구석구석 긁어버리고 와르르 무너지는 집안 살림살이를 보며 울다가 일어나서 휘리릭 집 밖으로 나가고는 하던 사빈씨는 계룡산, 팔공산 등등 유명한 절을 찾아가서 몇 날을 의탁하다 돌아오고는 했다.
그게 사빈씨가 어린 적 눈앞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동무 길순이의 처참한 주검을, 아마도 이념과 사상의 제물이 되어 가정을 풍비박산 내 버린 아버지와 눈앞에서 삶을 달리하는 선택을 보여 주었던 고모를, 할아버지를, 마을 사람들의 광기 어린 눈빛을, 외할아버지를, 어느 밤 어린 사빈씨의 손을 잡고 마을을 떠나 어두운 시골마을로 들어가 삶을 살아내기로 결심해버린 그녀의 엄마를 받아들이는 평생의 트라우마 극복 방법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드디어 모든 생각을 덮어버린 사빈씨의 공허한 눈빛을 보면서 이해할 수가 있게 되었다.
자신의 삶을 애써 좋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건드리는 일 같은 것은 하지 않은 채로. 그리고 그건 가난해서 먹을 것이 고구마밖에 없던 이웃의 동무 길순이를 한껏 두들겨 패며 도시락을 빼앗아 먹었던, 아무것도 모르던,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철부지 무남독녀 일곱 살 소녀 사빈씨가 마침내 스스로에 대해 속죄하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젠 모든 기억을 사빈씨는 잃었다. 일어나 걷는 법도, 음식을 씹는 법도 잃어버리고 만 사빈씨의 마지막 소원대로 사빈씨가 태어나 자란 마을에 가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나는 홀로 마을 길을 걸었다.
전우치나무가 길목을 지켜주는 교회가 있었다. 그곳에 내 엄마 사빈씨가 아프도록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죽음을 기리는 66인의 순교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다행이었다. 드디어 나는 엄마의 동무 길순씨 앞에 서서 그분만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가 있게 되었다.
길순씨! 평안하신지요? 66인의 순교자들과 험난한 이승의 삶을 버텨내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나요? 평안히 눈감지 못하고 돌아가신 당신의 마지막 길을, 당신의 도시락을 빼앗아먹었던 일곱살 철부지 우리 엄마 사빈씨가 평생을 잊지 못하며 사셨습니다.
역사의 사과를 받았어야 했던 어린 우리의 사빈씨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의 삶을 고통스럽게 살면서 평생을 길순씨에게 부렸던 투정을 속죄하며 살았습니다. 자신의 주머니에 행복이 쌓이는 것을 죄스러워하면서 평생을 불행한 편을 선택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용서받을 마음조차도 내어놓지 않은 채로 기억을 덮었습니다. 그러니 용서해 달라는 말도 저는 드릴 수가 없게 되어있네요. 그럼에도 마음 깊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나의 엄마 사빈씨도 이제 곧 길순씨의 곁으로 가시게 될 것 같아요. 아마도 동무분의 환영을 바라지는 않으실 것 같고요. 사빈씨는 사시는 동안 스스로의 평생의 불행에 대해서도 한번도 한탄하지 않으셨거든요.
순교 기념비나 순교 기념관이 길순씨와, 그리고 함께 명을 달리하신 분들의 짧고 불행했던 생애에 조금의 위로도 되지는 못했겠지만, 그래도 이 자리 기념비에 이름으로나마 뵐 수 있어서, 이렇게 말을 걸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하시길 사빈씨와 사빈씨의 딸이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