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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고두고 슬플 것이었다

by 미 지

6학년이 된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를 병으로 잃고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의 아들을 초등학교 전교회장으로 길러낸 삼십여 년 전의 알파 우먼이었다. 잘 생기고 잘 나가는 그의 아들은 벤츠 승용차를 몬다고 했다. 자주 미국 출장을 다녀오고는 한다고 아이도 종종 아빠 자랑을 했다. 그 손녀딸이 장애 1급으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으니 할머니의 속상한 마음이야 백 번 천 번 헤아리고도 남았다.

삼십 년 전의 전교회장 아들을 둔 엄마의 모습으로 할머니는 특수반에 아이를 등하교시키는 일을 맡았다. 삼십 년 전 특수반을 대하듯이 흘긴 눈과 퉁명스러운 말투로 아침마다 아이를 담당하는 특수교사와 특수보조교사에게 말했다.


"아이가, 너무 살이 찌잖아. 학교에서 밥을 너무 먹여서 그래. 밥 좀 적게 먹이고, 어제는 수학 공부를 안 하려고 해서 집에서 아주 힘들었어. 학교에서 가르치는 게 재미없나 봐. 잘 좀 가르쳐 봐요, 응?"


거의 매일 같은 말을 반복하는 할머니에게 보조교사와 특수교사인 나는 미소를 함빡 지어주면서 거의 매일 같은 응대를 하고는 했다.


"아이고~ 그러셨구나! 알겠어요~ 계속해서 지도해 봐야지요! 우리 아이들은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조심히 들어가시고 하교할 때 또 봬요~"



아이의 키는 6학년 또래 여학생에 비해 그다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선천적인 뇌병변 장애 때문에 손목과 발목이 아주 가늘고 손과 발은 유치원 아이들만큼 작고 고왔다. 그러니 걷거나 뛰기, 쓰기 공부나 만들기 활동 같은 것들을 할 때는 아주 힘들어하곤 했다.


5학년 겨울방학을 마치고 6학년이 된 등교 첫날 아이는 긴 겨울 방학 동안 바깥 놀이나 몸을 움직이는 활동은 거의 접어두고 지냈으리라 예상이 되는 살찐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불과 두 달 반 전이었던 작년 12월의 방학 직전에 입던 옷이 퉁퉁한 얼굴과 목 선과 튀어나온 배와 하체를 미처 다 가려주지 못한 울퉁불퉁한 선모양을 하고는 가느다란 손목과 발목에서 멈추어있는 차림이 되어있었다. 우리는 약간 당황을 했지만 그 순간 우리가 '생소함'을 담은 '의문형 시선'으로 아이와 할머니를 바라보기라도 한다면 엄청난 불호령이 떨어질 거라는 것쯤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얼른 함박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했다.


'방학 잘 지냈지요? 건강하게 다시 만나서 너무 반가워요~ 할머니께서도 건강하셨죠?"


할머니는 아이가 밖에 나가려 하질 않아서 가정방문 선생님과 학습지만 풀면서 방학을 보냈다고 답을 하셨다.


그리고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아이가 찐 살은 학교에서 먹는 급식이 원인이 되었고 6학년 수학 과정의 난해함은 특수반에서 성의 있게 지도하지 않은 탓에 아이가 풀지 못하는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5월의 좋은 아침, 할머니는 아이와 모처럼 좋은 날씨를 만끽하느라 천천히 걸어서 등교를 했노라며 교실로 들어오셨다. 아이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하얀색이었고 약간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아이는 말했다.


"선생님, 토 나올라고 해요!"


나는 얼른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 안에서 몇 번 구토를 하면서 음식을 게워 낸 아이에게 찬물 세수를 시키고 교실로 오면서 물었다.


"아침에 뭘 먹고 온 거야?"


"음... 초코파이 한 개, 고래밥 하나, 떡 하나, 미역국에 밥 말아서 먹고, 누룽지요~"


아이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고, 그만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아휴! 할머니, 아이가 아침에 밥하고 간식에 누룽지까지 많이 먹고 걸어오느라고 힘이 들었나 봐요. 보건실에 가서 약을 먹여야 할까요?"


보건실에 가야겠다는 말을 하자마자 아이는 발바닥이 갈라지는 것처럼 아프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많은 음식을 먹고 평소보다 더 먼 거리를 돌아서 걸어오느라 아이가 힘이 들었나 보다고 나는 말했고 그 아침의 일이 있은 오후에 나는 교장실에 불려 가서 야단을 맞았다. 특수반 선생이 자기가 무슨 의사라도 되는 것처럼 아이가 먹은 음식과 아침 운동에 대해 지적을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특수교사라는 직업은 그랬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만나지 말았어야 하는 인연으로 교사와 학생이 되어 한 교실에서 만나게 된다. 장애 자녀를 둔 부모의 슬픔은 세상 어떤 것보다 슬프디 슬퍼서 슬픔의 무게를 가늠하는 일이 불가능할 정도다. 그러니 아이의 보호자가 엄마나 아빠나 할아버지나 할머니일 때는 물론이고 양부모 또는 보호 시설의 원장일 때까지 각각의 독특한 아픈 사연들이 가슴을 짓누르는 시작을 하고 헤어질 때가 되면 늘 이번 인연은 잊고 새로 만나는 인연과 최선의 답을 찾아가셔야 한다는 이별의 말을 하며 돌아서고는 했다.


만나지 않는 것이 축복인 인연들을 반복해서 만나고 지내다 보면 스스로의 존재감에 대한 의심이 들 때도 있으니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항상 회색빛의 상념을 떨치지 못하는 직업병을 나는 갖게 되었다. 그런 직업이 있는지도 모르고 사는 것이 축복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 사람들의 세상에서 어떠한 사전설명이나 이해의 시간도 없이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툭 하고 던져져서는 '도움을 주겠다'라고 말하는 생소한 직업인으로서의 '특수교사'를 만나게 된 당사자의 입장에서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낯설고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하소연이라는 것 정도야 오래전부터 이해하며 지내왔다.


그러나 알고 맞는 매라고는 해도 겪을 때마다 점점 크게 느껴지는 아픔이 함께 커져가고 있었다. 교실 안에서 늘 같은 유형의 문제들을 반복하는 세월이 쌓이면서 상대방의 눈빛만 보고도 어떤 투정을 어떤 강도로 하게 될지가 예상이 되기 시작했으니, 때로는 일면식이 없는 상태에서 상담을 청해 오는 전화기 속의 목소리만으로도 상대방의 우울 정도가 가늠이 되기도 했던 것이었다. 이 직업을 통해 사람들을 대하거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는 화법이 노련해지거나 숙련도가 높아지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오는 것을 막지 못할 결론으로 가고 있던 중이었다.


원망의 단계에서 만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던 나는 많은 슬픔들을 만났다. 장애 자녀를 둔 보호자가 되어 세상에서 받는 불공평함이 슬픔에서 차차 섭섭함이 되고 미움이 되고 원망이 되어서는 가장 힘이 되어주고자 애쓰는 가장 가까이 서 있는 나 같은 사람을 향해서 어리광을 부리듯 날리는 절망의 훅을 이제 더는 견뎌 낼 힘이 없다는 생각으로 정리를 하던 중이었다.



몇십 년을 해 오던 일을 그만두고 나오는 일은 한순간의 사건과 사고로 생기지 않는다.





병든 시어머니가 와 있는 집에서 고3과 고1의 아이를 두고 남편에게 남아있는 모든 에너지를 꺼내 쏟아부으며 화를 퍼붓고 집을 나온 날 내 발걸음 소리보다 더 큰 소리로 구르는 캐리어 바퀴 소리만 나와 동행할 뿐이었다.


나쁜 일은 혼자 오지 않았다. 인생의 모든 순간을 통틀어 가장 외로웠던 그 밤에 나는 '나'라는 존재 때문에 불행한 학부모들과, 시어머니와 남편을 떠올리며 그들의 원대로 죽어 없어져버리는 일을 당장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세로 길을 걸었다. 그러다 차차 들려오는, 내 발치를 따라오는 내 짐가방의 바퀴 구르는 소리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나만 기다리고, 나만 의지하던 아들과 딸을 떠올리게 했다.


떨치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와서도 가방을 놓지 못하고 걷는 나. 그 밤의 내 모습이 그랬다.


그러니 나는 두고두고 슬플 것이었다.


두고두고 슬픔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들어야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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