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하고 등산을 갔다 내려오는 길이었어. 산 밑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야 하는데 주말이라 정말 너무너무 많은 사람들이 버스 정류장에 모여있더라. 지금이야 대부분 자기 차를 가지고 가던가 산악 모임 같은 데서 대절한 단체 관광버스를 타고 산행을 하지만 그때는 자가용 차도 별로 없을 때였고 산악회 모임 같은 것도 활발하지 않았던 때였지. 등산을 가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명한 산이 있는 지역의 버스 터미널로 가서 그곳에서 산행 출발지까지 가는 지역 버스를 타야 했고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면 집으로 가기 위해서 다시 그 버스를 타고 버스 터미널로 가야 했지. 1990년대 초반 10월의 가을에도 유명한 산이란 산에는 죄다 지금처럼 단풍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곤 했으니 같은 날 같은일정대로 움직이느라 비슷한 시간에 시작한 산행을 마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버스 정류장에 모이고 있었어. 평상시라면 거의 사람이 타지 않는 산자락 버스 정류장에 평상시처럼 운행하는 버스 한 대가 왔지. 버스를 기다리느라 여기 저기 몰려 서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달려가서 차에 올라타는데 먼저 온 사람, 나중에 온 사람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있나? 운이 좋아서 그 앞에 버스가 멈춘 탓에 얼른 탈 수 있게 된 사람들 뒤로 재빠르게 달려가서 타는 사람들, 힘이 세고 목소리가 큰 일행이 챙겨서 밀어주고 당겨주는 사람들이 버스에 올라탔어. 버스기사가 더는 탈 수 없다고 소리칠 때까지 무거운 배낭을 올리고 소리지르고 화도 내면서 빽빽하게 차에 올라타더란 말이지.
버스 몇 대로는 택도 없을 무리의 사람들이 남아서 그 버스가 떠나가는 걸 보고만 있어야 했어. 그중에는 다음 버스가 오면 더 빨리 달려갈 요량으로 마음을 다잡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지.
그때 우리 일행 중에 한 명이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사람들을 향해서 소리를 치기 시작했어.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무질서하게 버스를 탈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먼저 온 사람부터 차례차례 줄을 서서 질서를 지켜서 버스를 타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 지금부터 먼저 온 사람부터 차례차례 줄을 서 보도록 합시다. 질서를 지킵시다."
모여 서있던 사람들이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길래 우리 일행이 다 같이 그 친구를 도와서 한 마디씩을 했지.
"질서를 지킵시다. 자, 자, 자, 여기 이 분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줄을 섭시다!"
그렇게 앞에 서 있는 사람 하나를 가리키며 기준점을 알려주고 나니 사람들이 쭈뼛쭈뼛 그 친구와 우리들의 지시에 따라 줄을 서기 시작했어.
그렇게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탑승장에 버스가 들어왔고, 줄 서있던 사람들이 차례차례 버스를 타기 시작했는데, 서로 먼저 타겠다고 아우성을 치며 탈 때 보다 훨씬 더 빠르게,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버스에 올라탈 수가 있게 되었어. 드디어 그 버스가만원이 되어서 다음 순서로 서 있던 사람이 뒷 차를 타겠다고 하며 탑승을 멈춘 다음에도 웬만큼 틈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 일행은 그 틈으로 올라가서 끼어 탈 수가 있게 되었지. 우리는 줄 서 있는 남은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고 남은 사람들은 우리들에게 큰 박수를 쳐 주었어.
아주 보람 있는 날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버스를 탈 때 차례차례 줄을 서고 순서를 지킬 수 있게 된 건 2000년쯤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1990년대 후반에 태어난 아들과 함께 국내선 비행기를 타러 가는 버스를 탈 때 차례차례 줄을 서서 버스를 탔던 기억이 있다. 좌석번호가 있는 시외 고속버스를 탈 때도 와르르 달려가 빠른 순서대로 버스를 타곤 하던 시절이었으니 줄을 서서 차례차례 버스를 타는 것은 거의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기 때문에 낯선 기억으로 남아있다. 공항에서 시댁에 전화를 하기 위해 공중전화 부스 앞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기를 안고 있는 내 앞을 새치기해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으니 공중 질서에 대한 개념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 역시 그 무렵 정도가 되지 않을까 기억을 추슬러 볼 수가 있다. '에스컬레이터 한 줄서기로 타기'와 같은 캠페인이 차차 자리 잡히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으로 기억을 한다.
그러니 90년대 초, 가을 산행을 마치고 버스 탑승을 대기 중이던 그 많은 사람들을 차례차례 줄을 서도록 안내 한 그 친구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절 그들은 20대의, 80년대 학번의, 60년 대 태어난 대학생들이었다. 컴퓨터를 처음으로 다루기 시작한 그들의 세대명이 그렇게 대표화되었다. 30대가 되어서는 386 세대가 되었고, 40대가 되어서는 486 세대가 되었고, 50대가 되어서는 586 세대로 불리웠던 차차 60대가 되어가는 이 세대는 이제 세대명 같은 것은 의미를 잃은 그저 노답인 세대가 되어가고 있는 것도 같다.
그 시절, 무질서를 가다듬어 질서를 만들던 순간의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펼치던 젊었던 사람들의 소식을 가끔 일부러 찾아볼 때도 있다.
무지한 사람들을 일깨워 각성을 시킨 공로로 늦지 않은 시간에 버스를 탈 기회를 양보받았던 젊었던 286 세대들.
한 발 앞서 깨달은 탁월함으로 한 발 앞서 사는 권리와 함께 '잘한다' 칭찬을 얻어낸 사람들.
부스러기 정도의 자리일망정 놓치지 않고 잡아낸 나 역시 그 세대의 꼬리쯤에 속해서 그럭저럭 잘 살아왔다고 할 수는 있겠다.
그러니 나는 이제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세상을 바꾸는 사명감 같은 것이 꼭 필요한 것이었다면 조금쯤은 덜 단호하고 덜 잘난 척하며 걸어 갈 수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뒤늦은 죄책감이랄까. 아마, 그 표현이 맞을 것이다. 죄책감.
세상을 바꾸는 어마어마한 일은 내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으니, 나는 그저 작은 내 삶의 시간 안에서 내 아이들을 사회에 바르게 기여하는 사람으로 길러 내보내는 것이 괜찮은 선택지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서툴고 의아한 태도로 '며느리'와 '아내'를 대하는 '시댁'과 '남편'의 미개함과 미숙함에 대해 따박따박 짚어나가면서 기어이 고쳐내려고 날마다 선언하듯 하루를 지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직장과 가정과 어느 모임자리에서나 꼿꼿한 자기주장을 하고는 했다.
거기다가 장애학생들의 이상행동을 교정하기 위한 행동분석과 심리상담을 전공하면서 하나의 행동과 그 행동을 둘러싼 저변의 사건과 상황을 분석하는 것이 익숙해져 갈수록 앞에 있는 사람의 말 한마디와 눈빛, 또는 몸짓만으로도 전후관계가 해석이 되어버리는 내용에 대해서 크게 뜬 눈으로 떠오르는 대로 지적을 하느라 상대의 입을 다물어버리게 만들고는 했다.
상대방은 늘 분석받고 지적받고 주눅 들어버렸을 것이었다.
가장 많이 지적받고 가장 많이 주눅 들었을 사람은 남편이어야 했을 것이었다.
19년의 세월을 투쟁하듯 살았으니 그 정도면 내가 어떤 부분에 대해 의아해하고 어떤 부분에 대해 부당하다 하고 어떤 부분에 대해 화를 내는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으나 그 모든 생각들은 그저 나 혼자만의 결의였다.
고3인 아들과 고1인 딸이 곧 학교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오게 될 시간에 내 집 거실에서 느닷없이 병드신 시어머니를 위해 허벅지 살을 떼어 삶아드리지 않아 돌아가실 지경으로 만들어버린 며느리가 된 나는 그들이 나에게 그렇게 말하던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는 결단을 실행하기로 마음을 먹고 선언을 했다.
"아이들 밥은 해 주러 올 거야. 아이들에게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달려올 거야. 하지만 너와 너의 어머니를 위해서는 이제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이제 이 집에서 아침 저녁 아무 일 없었다는 듯한 얼굴로 지내는 일은 불가능할 테니 나는 이제 집을 나갈 거야."
파출부를 파견해 주는 용역 회사 두 곳의 전화번호를 넘겨주며 나는 가방을 쌌다.
고3인 아들을 두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3인 아들을 둔 집안에서 더 이상 아이들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었다.
할머니의 중병이라는 피할 수 없는 불행이 덮쳐온 상황에서 나름의 답을 찾기 위해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실존적인 엄마가 이어가는 싸움을 아이들에게 다 열어 보일 수는 없는 상황이 아니던가.
'너희 할머니가 병든 것이 엄마 탓이니 옛날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전설의 고향에서 그랬던 것처럼 엄마 허벅지 살이라도 떼어서 끓여 먹이는 정성으로 살려 내야 한다는구나. 너희들은 병든 네 할머니를 위해 엄마와 아빠가 병원 치료보다 더 신박한 치료법을 알아보러 다니는 동안 알아서 잘 지내야 한다'는 말을 할 수는 없는 상황 아니던가.
나가지 말라고 남편이 막아섰다.
그러나 그와 그의 어머니는 기어이 나를 잡지 못했다.
아이들이 차례차례 집으로 돌아왔고, 내가 주눅 들게 하는 눈빛으로 그들 모두를 쏘아보았으므로.
사람이 사람에게 화를 내는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라고 나는믿어왔다.
하나는 상대방이 가야 할 길, 해야 할 일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을 때다.
다른 하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이 채워주지 못할 때인데, 그럴 때 나는 화를 내고 있다고 느끼지만 그것은 해결책 같은 데는 관심이 없다.
그 둘 사이의 차이점이 무엇이었는지는 시간이 조금 필요한 일이 되고는 하기에 내가 느끼는 분노의 감정 속에 들어있는 것이 상황 때문인지 감정 때문이었는지 분별해 내려면 같은 사건이라 해도 그 일의 결과를 보아야 하는 일이 종종 생기고는 한다.
시어머니를 만나서 함께 사는 동안 나는 언제나 시어머니의 마음을 만족시켜 드리지 못했다. 그분은 내 얼굴을 볼 때마다, 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인상을 찡그리고 불쾌해하고 불편해하셨다. 아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면 늘 나 때문에 당신이 얼마나 괴로운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는 했으므로 나는 그분의 불편함과 불쾌함을 내가 조금 더 잘하는 것으로 만족시켜 드리려고 애를 썼지만 도무지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분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분의 감정이 우울에서 나오는 불행감이었다는 것을 알게는 되었다. 그분을 '불행하게 만드는 나'는 내가 변하면 해결이 될 일이었을 테지만 그분에게 '불행감을 안겨주는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답이 명확해져가고 있던 때였다. 시어머니의 불행감을 해결해 드릴 수 있는 방법이 나에게는 없었다.
시어머니는 종종 자신이 집안일을 도와주던 사람들과 함께 살았던 시절 이야기를 했는데 그 아이들 얼굴을 볼 때마다 그렇게 짜증이 나서 날마다 그들을 향해 화를 냈다고,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고 말씀을 하곤 하셨다.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화. 그리고 그 화를 가라앉게 도와드릴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결론에 다다라가는 나. 한 공간 안에 두 사람이 있었다.
그날의 장면으로 나는 몇 번이나 되돌아가서 상황을 짚어보고는 했다.
퇴근을 해서 집에 들어온 나를 향해 시어머니의 병시중을 도와주던 아주머니에게 하루 일당을 드리고 퇴근을 하시게 하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그니가 어머니와 함께 하는 낮시간의 일이 축약된 한 두 마디의 말을 전해 들었다.
"오늘은 남편사장님하고 마트에 가서 장을 봐다가 된장국이랑 미역국을 끓여드렸어. 그리고, 며느리! 그러니까, 애들 어릴 때 좀 봐 달라고 하지, 애 봐 달라고 했으면 말로는 안 봐준다 하셨지만 다 봐주셨을 텐데 왜 안 그래서 지금 어머니가 저렇게나 아픈데도 며느리한테 아무 말도 못 하게 해?"
눈을 크게 뜨고 두 사람을 바라보는 나를 시어머니가 외면했다.
아주머니가 가고 나서 테이블에 놓여있는 전기 요금 고지서에 찍힌 청구금액을 보다가 난 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어머니를 보며 말했다.
"이번달 전기 요금이 40만 원이 나왔네요! 하루에 세탁기를 두 번을 돌리니까 그렇기는 하겠네요. 처음이에요, 이런 액수는..."
아마 그날 내가 잘못한 일이 있다면 바로 그 말을 한 것이었다.
시어머니는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매번 손빨래를 시켰다. 면으로 된 속옷은 꼭 삶아서 손빨래를 하라고 시키곤 했는데 아주머니는 '요즘 같은 때에 무슨 손빨래를 하라고 하느냐' 코웃음을 치면서 집에 있던 삶아 빨기 전용 세탁기와 드럼세탁기에 나누어서 매일 빨래를 했다. 삶아 빨라고 시킨 수건 한정과 팬티 한 장은 삶는 세탁기에 넣어 삶아 빨았고 어제 입었던 옷 한 벌은 드럼세탁기에 넣어서 빨았다. 건조기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세탁을 마친 옷들은 다림질로 말려서 드렸다. 그러니 시어머니가 와 계시던 몇 달 동안 우리 집 전기 요금은 30평대 아파트에서 평소 쓰던 전기 요금에 비해서 세 배 이상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머니가 조금이라도 앉아서 쉬려고 하면 돈을 받아가는 사람이 앉아서 쉰다며 면박을 주었으니 그이는 베란다에 나가 걸레를 꼼꼼하게 빨았고 낮에 장을 봐 온 식재료들을 손질했다. 베란다 바닥에 앉아서 하루 종일 수돗물을 졸졸졸 틀어놓고 쪼그리고 앉아서 두 시간이기도 하고 세 시간이기도 하고. 그게 그이가 어머니의 잔소리를 피해서 쉬는 일이었다.
바로 그 전기 요금과 수도 요금에 대한 이야기를 나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
모르는 사람이 아무리 무례하게 굴어도 절대로 그를 향해 화를 내는 것을 하지 않아서 살아있는 보살이라고 칭찬이 자자하다는 자찬을 하시곤 하던 시어머니는 도와주려고 하는 익숙한 사람들에겐 폐부까지 찔러대는 경멸을 담은 말을 성큼성큼 던지고는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쟤가 낯빛이 변한다'는 말을 하는 패턴을 반복하곤 했다.
아이들이 집에 돌아오기까지는 서너 시간 정도가 남아있었다. 퇴근 후 옷을 갈아입고 안방 침대에 누워 쉬려고 할 때 시어머니가 문을 두르리며 살며시 열었다. 시어머니는 손에 든 돈 한 다발을 쥐고 살짝 흔들면서 내 눈을 보며 말했다.
"저기, 이거... 이걸 너한테 줘야 할 거 같은데... 이번 달 수돗물값이 많이 나왔지? 아까 애비가 찾아온 돈인데 140만 원이다."
시어머니는 약간 눈치를 보는 듯한 기색으로 나를 보면서 뜻을 알 수 없는 140만 원이라는 돈다발을 내 눈앞에서 흔들었으므로 난 처음엔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다가 40만 원의 전기요금이 포함되어 있는 당신의 의탁 비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매달 아주머니에게 드리는 돈 180만 원과 어머니의 병원비도 나는 달라고 한 적이 없었는데 그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어머니를 보는 내 눈빛에는 아마 불쾌함이 담겨있을 것이었다.
"그냥 조카 주세요." 나는 어떤 말도 앞뒤에 붙이지 않고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식탁으로 가서 아주머니가 만들어두고 간 반찬들로 저녁밥을 차려서 드렸다.
다음날부터 나에게 욕 하나가 더 늘었다.
"미* ㄴ이 돈을 준다고 해도 안 받으면서 제멋대로야."
남편이 거들었다.
"그러게요, 보통은 돈을 주면 그 돈 때문에라도 효도를 하려고 하는데 말이에요. 돈 때문에라도 부모님을 모시려고 하면 차라리 효부인데 말입니다."
주방과 침실이 붙어있는 원룸의 오피스텔에 가방을 풀어놓고 누워서 나는 90년대 어느 가을날 하산길의 무질서한 군중들을 줄 세워 질서를 만들어낸 486 지인들의 영웅담을 떠올렸다.
고3과 고1의 아이들을 암환자 할머니와 그에게 길들여진 아빠 곁에 두고 나온 모진 엄마의 첫날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