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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또 미워하는 나의 어머니, 사빈씨!

by 미 지

육이오 전쟁을 즈음하여 사빈씨는 아버지를 잃었다.

사빈씨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 시절 길 가는 개들도 입에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강경 포구에서 잘 살기로 일, 이등을 다투는 집안의 장남이며 장녀였다. 어린 아들과 딸을 둔 두 집안의 바깥어른들이 진즉부터 서로 사돈 지간이 되기로 약속을 하고 있던 터에 아들을 둔 집안에서 부인이 먼저 세상을 뜨고 난 뒤 딸을 둔 집안에서 '할 줄은 모르지만 밥이라도 챙기게 해라'하고 말하며 선심 쓰듯 어린 딸을 시집을 보냈다.


그렇게 사빈 씨는 마을 대표 지주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를 둔 집안의 고명딸로 태어나 온 마을의 사랑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국민학교 1학년 입학을 하던 날 할아버지가 사주신 빨간 구두와 빨간 에나멜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갔다. 옆 집에 사는 엄마보다 서 너 살 많은 길순이가 엄마가 학교 가는 길을 동행해 주곤 했다. 벤또(도시락)를 허리에 두르고 학교에 가서 길순이랑 함께 밥을 먹는데 길순이 벤또에는 고구마 두 개가 담겨 있었다. 어린 엄마는 그 달디달고 맛난 고구마를 너 혼자만 먹으려고 하느냐 성질을 내며 가방으로 길순이를 두들겨 패고는 그 고구마 하나를 빼앗아 먹었다고 했다.


육이오 전쟁이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이 험악한 얼굴을 하고 긴박하게 뛰어다니던 어느 스산한 밤이 지나 학교에 가려고 해도 오지 않는 길순이를 기다리다 길을 나선 어린 엄마는 마을 방공호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있는 사람들 무리를 보고 소스라쳤다. 거기에는 어린 엄마의 학교길 동행친구, 맛있는 고구마 벤또를 허리에 둘러메고 다니던 길순이가 눈을 부릅뜬 채 피투성이가 되어 입을 벌리고 누워있었다.


밤이면 빨간 완장을 찬 사람들이 마을을 돌며 사람들을 잡아갔고 낮이면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밤 동안 행패를 부리던 사람들을 잡아갔다.


그의 아버지가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무슨 말인가를 하면 모여 있던 사람들이 큰 함성과 박수로 응대를 해 주던 광경을 사빈 씨는 기억한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르게 곱디고왔던 젊은 고모가 사빈씨 눈 앞에서 생을 달리하고 난 뒤 할아버지가 툇마루에서 피를 토하며 돌아가셨다. 누렇게 벼이삭이 패던 논둑 사이로 몸을 피해 사라졌던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전 형무소에서 딱 한번 면회를 한 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잘나고 똑똑한 남편과 함께 모여 공부를 하며 머릿수건 속에 쪽지를 나르는 심부름을 하던 사빈 씨의 어머니는 나중에서야 그게 빨갱이들의 운동이었으며 자신이 한 일이 빨갱이 첩자의 일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젊은 시누가 그 모임에서 함께 공부하며 연정을 키우던 종 놈에게 배반을 당했다. 그들이 하던 좌익 운동이란 게 마을에서 사람들을 함부로 부리기로 악명이 높았던 사빈 씨 외할아버지를 잡아다 죽이고 사빈 씨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재산을 죄다 빼앗으며 행패를 부리는 일이었으니 자신들이 하던 일이 결국 자기 집안을 풍비박산 내는 일이었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된 고모는 사빈씨의 손을 잡고 산책을 하던 왕진나루 바위 위에서 몸을 던졌다. 그 고모가 눈앞에서 사라진 것이 무슨 영문인지를 모르던 사빈씨가 집에 돌아와 엄마와 할아버지에게 '고모가 바위 위에 서 있다가 내 이름을 한 번 부르고 눈앞에서 사라졌다'는 말을 할 때 사빈 씨의 할아버지는 하늘을 보며 한참을 서 있다가 말했다.

'차라리 잘했다. 그리 살아 무얼 하나...'


사빈 씨의 할아버지는 독립운동 자금이 필요하다고 찾아오는 독립군이 있으면 몰래 창고에 숨겨주고 배불리 먹인 다음 넉넉히 자금을 챙겨서 보내고는 했다는 말은 나중에 들어서 알았다.


초등학교 1학년을 다니던 사빈씨의 손을 잡고 왕진 나루에서 배를 타고 길을 떠난 사빈 씨의 어머니는 고향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산골 마을에 들어가 어찌어찌 정착을 했다. 일본의 광산으로 마을에서 한 명씩 보내는 일꾼으로 차출되어 끌려가 일하다가 폭발 사고로 겨우 목숨을 건져 돌아왔으나 마음의 병 때문이었는지 몸의 병 때문이었는지 산에서 땔나무를 해 오는 일도 힘들어하는 김 씨 성을 가진 남정네와 새 살림을 꾸리고 그 후로 김 씨 성을 가진 육 남매를 낳았다. 사빈 씨는 김 씨 성으로 개명을 하라는 어른들의 권고를 단호하게 뿌리치고 박 씨 성으로 남기를 선택하였다.


사빈 씨의 어머니는 그에게 생긴 모든 일들이 남편이 했던 '공부'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사빈 씨를 비롯한 모든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다. 사빈 씨는 국민학교도 보내지 않았고 다른 딸들은 어찌어찌 국민학교만 졸업시켰으며 아들들은 본인들이 우기고 우겨서 고등학교까지는 졸업을 했다.


사빈 씨는 어릴 적에 기운이 없고 삐쩍 말라서 주변 사람들에게 오래 못살고 죽게 될 거라는 수군거림을 듣는 아이였다. 고기가 흔한 시절이 아니기도 했지만, 어쩌다 상에 올라오는 고기도 입에 맞지 않아 먹지 못했고, 점점 더 음식을 먹는 일이 싫어졌다.


사빈 씨의 어머니가 목화로 실 삼는 일로 돈벌이를 하러 나간 어느 날 사빈 씨의 새아버지는 집안에 키우던 새빨간 부리를 가진 장닭 한 마리를 잡아다가 산에서 캐 온 약초를 넣어 무쇠솥에 한참을 끓여서 사빈 씨를 불렀다. 고기 한쪽을 찢어 사빈 씨에게 먹을 수 있는지 묻고, 그 고기 한 점을 받아먹은 엄마가 '네, 맛나요!' 하는 답을 할 때 씨익 웃었다. 그는 고기를 잘게 찢어 채반에 담아 뚜껑을 덮어서 대나무 찬장 위에 올려놓고서 오늘이 지날 때까지 그 고기 한 채반을 다 먹어야 한다는 숙제를 내주었다. 새아버지가 시킨 대로 사빈 씨는 어머니 없는 부엌을 들락날락하면서 그날 늦은 저녁이 되기 전에 그 숙제를 다 마쳤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는 남편도 못 먹이는 장닭 한 마리를 다 먹었다는 딸 이야기에 아무 말을 못 했다. 새아버지는 기운 없는 얼굴에도 웃음을 지으며 '되었다, 이제. 너 안 죽는다' 그리 말했다.


십 대를 갓 넘겨 비단 생산지로 유명하던 유구읍으로 나가 방직 공장에 취직을 해서 비단을 짜면서 나름 빛나는 청춘을 보냈다. 쉬는 날이면 고운 옷감으로 만든 옷과 알록다록 고운 연지 화장을 하고 집으로 가면 마치 연예인이라도 온 듯 마을의 어린 아이들과 젊은 총각들이 엄마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런 순간의 즐거움은 잠깐이었고 부모 곁을 떠나 여공들이 모여 사는 공장 기숙사에서의 생활이 생각보다 녹록지 않아 마음이 지쳐갈 즈음, 그대로 두면 애를 망칠지도 모르겠다는 어머니의 걱정 탓에 시오리 밖에 사는 스물세 살 노총각과 서둘러 결혼을 할 때 사빈 씨의 나이는 열일곱이었다.


육이오 전쟁을 즈음하여 남편은 어머니를 잃었다고 했다. 혹독한 시집살이와 남편의 도박과 술이 부른 가난 때문에.

남편의 아버지는 노름으로 집 한 채를 잃었다고도 했다. 어느 날 어린 남편이 이웃집에서 친구와 놀다가 그 집 주인장이 건네준 '쥐방울 만 한' 떡을 맛나게 먹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의 아버지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는데, 거지처럼 남의 집에서 떡을 얻어먹었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흘러 남편은 그날 아버지가 자신을 두들겨 팬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는데, 남편의 아버지가 노름빚으로 넘긴 바로 그 집의 주인이 집들이 선물로 마을에 떡을 돌리던 날 생긴 일이었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그날 이후로 남의 집에서 음식 대접받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 되어버렸다. 그는 사빈 씨와 갈라져서 혼자 살게 되어서도 서너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노인복지관에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의 어머니는 남편이 열 살 되어 처음으로 국민학교 1년을 다니던 늦은 겨울에 시름시름 기운도 없이 앓는 중에도 길쌈을 하다 앉은자리에서 그대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어머니 장사를 치르고 얼마 안 있어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핀 뒷산에서 나무를 하던 남편은 '아이고, 우리 엄니, 쫌만 더 사셨으면 이렇게 이쁜 꽃 보고 가셨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학교는 더 이상 다닐 수 없었고, 곧 어린 여자 아이 손을 잡고 젊은 새어머니가 집에 들어와서는 그야말로 소같이 집안일, 논 일, 밭 일을 다 했단다.


남편은 힘이 장사였다. 열 살이 되어 이웃에 살던 선생님 손에 이끌려 처음 들어간 국민학교 받아쓰기 시험에서 '숟가락'을 '숫가락'으로 쓰는 바람에 한 문제를 놓쳐 90점을 받은 일이 못내 억울해서 2학년때는 기어이 1등을 하리라 마음먹었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학교는 꿈도 꿀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고, 하루 종일 할머니 말동무를 하다가 산에서 나무를 해 오고 가마니 짜기 같은 일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버지는 새어머니에게도 살갑지 않았고, 할머니도 새어머니를 여전히 구박했지만 그니는 튼튼한 몸으로 소같이 버티며 그 가난한 살림을 감당해 냈다.


어느 날 점심, 할머니와 겸상을 받아 그 앞에 놓인 고봉밥을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밥 속에 들어있던 메주콩 하나가 반쪽으로 갈라는 지는 듯싶은 모양이 이상하게도 보여서 그것을 숟가락으로 집어보았다. 그 콩 주변에 있는 밥이 푸르스름한 빛깔을 띄고 있는 걸 할머니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할메, 이게 뭐여?' 하며 그 밥 속에서 나온 파르스름한 콩을 할머니에게 보여주려고 하는데 새엄마가 쪼르르 달려와 밥그릇을 냉큼 빼앗아다가 그 파란 콩 주변의 밥을 한 숟갈 크게 떠서 버리고 새 밥을 채워 담아 가져다주었다.


나중에 들은 말로 그 시절 청산가리를 그런 식으로 썼다고 했다. 새엄마는 배 다른 남매 넷을 낳고 사빈 씨가 시집을 온 다음에도 술 취한 남편에게 등짝을 펑펑 얻어맞으면서 잘도 버텨 살아주었기에 남편은 그날의 사건을 잊기로 마음을 정했다.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그날 내 밥 속에 넣었던 그게 무엇이었느냐 따지고 싶은 날도 있었지만, 매일 새벽마다 교회로 새벽기도를 가는 그니의 기도 속에는 필시 의붓아들을 죽이려 했던 그 밥 속의 것에 대한 사죄의 마음도 있을 거라고 믿으며 살았다. 죽도록 고생만 시키는 그니의 남편이 모질도록 미워서 그 남편의 아들이라도 죽이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래도 내가 그걸 먹지 않아서 죽지 않았으니 그니에게는 그게 그니 생의 가장 다행스러운 일은 아니었을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

군 입대를 앞두고 늙은 총각 놀림을 받던 중 시오리 떨어진 마을 김 씨 집안에 박 씨 성을 가진 처자와 혼인을 하게 된 남편은, 그 처자도 자신처럼 사연 많은 가족사를 가지고 만났으니 애틋한 마음으로 잘 살아보리라 마음먹은 적도 있다 했다. 사는 일이 녹록지 않아서 다치고 아프고 일도 안 풀리고, 화급한 성질에 술과 노름으로 시간을 보내고서는 사빈 씨를 때리거나 집안 살림을 때려 부수는 날들이 많았지만, 마음 끝까지 들여다보면 그래도 잘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본심이기는 했다고 믿었다.


그런 새엄마와 그런 새아빠를 둔 가난한 두 집안의 처녀 총각이 부부가 되어 날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신산한 삶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다가 천둥 벼락 치듯 엄청난 삶의 굴곡을 덜그럭 덜그럭 견디며 살아내다가 각자의 삶을 살기 시작한 십여 년의 세월. 비로소 지금이 제일 행복하게 되었다 한다. 사빈 씨도 그의 남편도.


사빈씨는 내가 기억하는 한 아주아주 가난하고 볼품없어서 구질구질하기까지 한 일상을 보내왔다.

날품팔이하듯 막노동을 전전하는 남편은 하루 일당이 좋은 날엔 도박판에 들어가 날 밤을 새웠고 이튿날 느지감치 술 마시고 들어와서 식구들을 쥐 잡듯 하곤 했다. 고분고분하게 맞고 구겨지는 성격은 아니었던 사빈 씨는 상을 뒤엎는 남편에게 대들다 맞아서 그만 눈알이 빠진 날도 있었다. 쏟아진 눈알을 반사적으로 손바닥으로 눌러가며 얼른 제자리로 집어넣었는데 택도 없이 아리고 쓰리고 펄펄 뛸 정도로 아팠다고 했다. 뺨을 심하게 맞아서 턱이 돌아가는 날도 있었다.


남편은 언젠가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그날의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도 아득바득 대들길래 뺨을 한 대 갈겼지. 턱이 쑥 돌아가더라고. 어버버버 말하는 게 심상치가 않아. 아차! 큰일 났다 싶었지. 에라 모르겠다, 반대쪽 뺨을 다시 갈겼지. 감쪽같이 틀어진 턱이 제자리로 돌아오더라고. 허허허”


어릴 적 한 고향 살던 꾀백이 친구들이라며 소중하게 모임을 이어오던 친구들이 그날 이후로 남편에게서 등을 돌렸다. 친구들이란 친구들은 다 등을 돌리고 명절날 큰 형님 댁이라며 찾아오던 친척들도 술 마신 다음 벌게진 눈으로 이 새끼, 저자식 호령을 부려대며 급기야 발길질까지 하는 남편을 하나 둘 멀리했다.


남은 친구들이란 게 고작 도박판 사람들뿐인지라 늦은 밤까지 집에 안 들어오는 남편을 찾으러 사빈 씨는 도박장에 쳐들어가서 ‘니들 다 신고해 버린다’ 소동을 부려가며 남편을 찾아오곤 했었다. 여지없이 집안 살림이 무너지는 밤을 보내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기어이 그렇게 되어버리는 밤을 꿋꿋하게 버텼다.

그런 날만 반복되는 게 아니었던지라, 그런 밤 한 번 지나면 또 한 두 달은 점잖게 돈을 벌어다 주는 남편이었던지라. 제비조동아리같이 밥 달라고 제제거리는 자식새끼들 입에 들어갈 먹을거리 만드는 재미가 있어서 그냥저냥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실은, 어릴 적 고향에 살던 사람들이 가끔 남편에게 연락을 해서는 '니 안사람 집안이 새빨간 공산당 집안이라는 걸 내가 다 안다. 내가 지금 돈이 조금 필요한데 니가 그걸 해 주지 않으면 내가 그걸 확 신고 해 버릴려고 한다'라고 말하고 가고는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중이었다. 남편이 사빈씨를 함부로 대하는 이유 중에는 그런 집안의 내력 때문에 그가 받은 그런 협박도 들어있는 것이라고 여기며 그녀는 모진 시간도 이를 악물며 견뎌버렸다.


몇 년을 모아 다 쓰러져가는 집 한 채를 장만했을 때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윗집에서 수돗물을 쓰고 있기에 구차하다는 생각도 없이 물 값을 낼 테니 수돗물 좀 쓰게 해 달라고 부탁해서 물이 떨어질 때마다 기다란 호스를 연결해 부엌과 앞마당에 있는 대야와 항아리마다 물을 채워 썼다. 물을 길러 공동수도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게 수지맞은 것보다 더 신났다.

물 값이 삼천 원이 나왔다고 윗집 안주인이 말하면 우리가 쓴 물 값이라며 이천 원을 냈다. 내가 왜 우리가 저 집보다 적게 쓰는데 물 값을 그렇게 많이 내느냐 물으니 사빈 씨는 말했다.

“우리가 빌려 쓰니까 많이 내야지”

이듬해에 우리 집에도 수도를 들였다. 이번에는 아랫집에서 수돗물을 쓰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할 때 사빈 씨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한 달이 지나 아랫집에서 물값이 얼마 나왔나 물으러 오면 사빈 씨는 말했다.

“이번달 물 값이 삼천 원이 나왔으니 그 집은 천 원만 내.”

왜 지난번 윗집에는 우리가 빌려 쓰니까 많이 내야지 그랬으면서 이번에 우리 집 수도 빌려 쓰는 아랫집에는 물갑을 적게 받느냐고 나는 또 물었다.

사빈 씨는 내 말에 답했다.

“우리가 주인이니까 많이 내야지”


지금 사빈 씨는 이런저런 기억들을 다 섞어버리고 산다. 꼬불쳐둔 비상금 뭉치는 장판 바닥에서 나올 때도 있고, 서랍 천정에 테이프로 야무지게 붙여 놓아서 섞인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영 찾을 수 없었을지도 모를 모양으로 꺼내 놓기도 하고, 아마도 어쩌면 영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서 그냥 내다 버린 것도 있을게 틀림이 없다.


이젠 오십대로 접어든 자식 셋에게 백만 원이 담긴 봉투를 하나씩 나누어 주며 '이게 이제 내 가진 돈 전부다. 에미가 맨 정신으로 주는 마지막 용돈이라 생각하고 받아라. 난 앞으로 노령연금 받아서 한 달 한 달 살 테니 내 기억 없어지기 전에 얼른 가져가라' 말하고 난 뒤, 사빈 씨는 마음 놓고 기억을 섞었고, 섞인 기억 때문에 안절부절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하루하루를 지내곤 했다.





프랑스의 단편 소설 작가인 '마르셀 에메'는 신비로우면서도 위트 있고 신랄한 전개로 현대의 AI 설정에도 뒤처지지 않을 법한 이야기를 남겼는데 대표작으로는 뮤지컬로 각색되어 공연되기도 하는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벽을 뚫는 남자)'가 있다.

그의 소설 '사빈느'에서 주인공 사빈느는 자신의 몸을 무한대로 복제시키는 분신술을 쓸 줄 아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원하는 대로 어느 곳에나 동시에 몸과 마음을 가게 할 수 있고 모든 감각을 공유하는 능력을 가진 사빈느는 남편이 있었음에도 6만 7천 명의 분신을 만들어 각기 다른 계층, 연령, 인종의 애인과 남편을 두고 욕망을 채워나간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분신 중 하나인 루이즈가 그러한 삶에 회의를 느끼고는 속죄를 위해 빈민굴로 들어가 최하층민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결국 더러운 괴물로 표현되는 인물로 인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 루이즈를 계기로 세계 곳곳에 있던 6만 7천여 명의 사빈느들이 동시에 처절하면서도 고통스러운, 또한 신비롭기까지 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빈 씨의 이름은 바로 이 소설 속 인물인 ‘사빈느’에서 빌려왔다.

나의 어머니, 그의 딸들, 그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들도 모두 사빈느가 아니었겠는가 싶은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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