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에 사는 조 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어. 나보다 서 너 살 위였지. 어쩌다 둘이 그날 그 산길을 걷게 되었는지는 몰라. 말없이 길을 가는데 풀 숲 사이로 얼핏 희끗한 것이 보였어. 내가 먼저 봤지. 그렇지만 난 무시하고 그냥 가고 있었는데 그니가 그쪽으로 성큼 걸어가는가 싶더니 곧 반색하며 큰 소리를 치더라. '어이! 이거 꿩 알이네, 꿩 알!' 그니가 함빡 웃으며 손에 꿩 알 여섯 개를 들고 나왔어. 그 모양을 보면서 난 속으로 성이 났지. 나도 봤는데... 내가 먼저 가져올 수 있었는데.... 그렇지만 뭐 별 수가 있나. 배만 아파하면서 등을 돌려 가던 길을 가려는데 그가 이어서 말했어. '어이, 이거! 우리 둘이 가다가 주웠으니까 이건 우리 둘이 나눠야지' 그러면서 꿩 알 세 개를 날 주는 거야."
아버지는 칠십 살이 되던 해에 엄마와 별거를 시작했다. 장수하는 유전자를 가진 것이 틀림이 없는 혈기 왕성한 건강 체질을 가진 아버지가 뒤늦게 시골 생활에 재미를 붙인 엄마를 따라 시골살이를 하다가 도시에서 살던 때와 마찬가지로 혈기를 부렸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그런 난폭한 광경을 생전 처음 본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어 아버지를 외면하고 엄마를 보호해 주기 시작했다. 스물여섯에 만나 사십 오륙 년을 함께 사는 동안 한 번도 그런 행동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배워보지 못했던 아버지는 평화로운 시골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를 향해 보내는 경멸의 시선에 처음으로 낯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날로 당신의 화물차를 끌고 도시로 돌아와 고시원으로 들어가 혼자살이를 시작했다. 언제든 다시 엄마의 집으로 들어갈 수는 있었으나 그냥 그렇게 쫓겨났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다시는 엄마를 보러 가지 않았다. 그게 아버지가 엄마에게 보내는 마지막 사과라는 것을 우리 삼 남매를 포함한 일가친척은 모두 알고 있다. 두 분이 화해하여 여생을 함께 보내라는 충고 같은 것도 없이 늦게나마 마땅히 그리 되었을 상황이 된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며 필시 사필귀정이리라는 인정을 하고 있다.
주변 모든 사람들로부터 당신 인생의 칠십 년을 죄다 부정받던 순간에도 아버지는 삶의 끈을 놓지 않았다.
폐가 건강한 사람은 절대로 우울증에 빠지지 않는 법이다.
어디를 가든 자기 몸을 움직여 밥벌이를 할 수 있으니 공부를 할 필요도 별로 느끼지 못한다. 공부를 하려고 했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밭 일을 하다가도 홀연 사라져 마을 도박장에서 밤을 지내고 오기 일쑤였으니 당장 눈앞에 굶고 있는 가족들에게 등을 떠밀려 어릴 때부터 나뭇짐을 제 키보다 높게 둘러메고 장터에 나가 나무를 팔아다가 식구들 끼닛거리를 만들어 주었고, 그 건장한 몸으로 막노동을 전전하며 서울에 집을 지어 삼 남매를 키우는 일가를 이루었고, 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어린 남매를 데리고 들어온 계모가 낳은 동생들 중 셋을 차례차례 건사하기도 하였다. 어느 것 하나 칭찬받는 일이 없었고 그 또한 그가 해 낸 일에 공치사를 하는 일도 없었다. 그저 살아 있으니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식구들이 굶지 않게 하는 일을 아침이면 해가 뜨고 밤이 되면 해가 지듯이 그저 했을 뿐이다.
낮은 자리에서 험한 일을 하며 높은 자리의 사람들로부터 쏟아지는 폭언과 비인간적인 처우를 또 내리는 비와 우박과 눈처럼 그저 받아내고 생각 없이 흘려보내며 살아내는 것이 매일의 일이었으니 그로 인해 받은 것이 상처라는 것을 느낄 겨를도 없이 무의미한 의무로만 채워진 하루의 마무리는 그날 낮에 쌓였던 감정의 쓰레기들을 감추지 않은 채 그대로 가족들에게 쏟아붓는 일이었다. 아침이면 가책을 느낄 겨를 같은 것도 없이, 또는 좀 더 점잖고 좀 더 괜찮은 직업을 가져 볼 생각 같은 것도 없이 달라지지 않는 바닥인의 하루를 보내는 반복. 한 순간도 그런 일상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던 70년이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일찍이 말 세 마리가 그려진 마패와 함께 노비 셋 짜리 벼슬을 돈을 주고 사셨다고 했다. 그 증서란, 어느 곳에든 정착을 하면 관으로부터 노비 세 명과 경작지를 내어 받을 수 있는 권리라고 했으나 한일합방이 되고 그 증서는 말짱 휴지 조각이 되어버렸다. 재산은 장남에게만 물려주는 시절이었으니 삼남이었던 그는 솜틀 기계를 하나 장만해서 마을을 돌아다니는 일을 시작했다.
한 마을의 사랑채를 빌려 솜틀 기계를 설치해 몇 달을 거기서 묵으며 목화솜이불을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솜이불을 틀어주었는데 솜 트는 일만이 아니라 관상과 사주를 보는 일도 겸업을 했으니 제법 벌이가 되는 일거리였다고 했다. 양가 집 규수는 꿈도 못 꾸는 직업이었으나 어느 마을에 가든 탐을 내는 사윗감이기도 하였기에 오래지 않아 어린 고명딸을 의탁시킬 테니 밥이라도 짓게 하며 살게 해 달라는 부부의 청을 받고 그 마을에 눌러살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아내에게 돈을 주면서 아들들 공부도 시키라는 당부를 하고 몇 달씩 멀리 솜틀일을 하러 떠나 있다 오곤 했는데 어린 그 아내는 남편에게 받은 돈으로 친정 부모님을 건사하는 데 쓰고 아들들은 나무를 해다 파는 일을 시키고는 했다.
그의 셋째 아들이 내 아버지의 아버지이다.
그의 형제 중 하나가 막내딸을 한 마을로 시집을 보냈다. 어리디 어린 딸이었는데 한 해를 넘기지 못한 한겨울에 그만 죽었다고 했다. 나중에 소문으로 알게 된 사실은 그의 젊은 시어머니가 어린 며느리를 어찌나 구박했는지 밥 한 술 제대로 뜨게 하는 법 없이 모질도록 일을 시키고 또 시켰다고 했다. 배고픈 며느리는 어느 날 쌀을 씻다가 생 쌀 몇 알을 입에 넣는 것을 시어머니에게 들키는 바람에 한없이 두들겨 맞은 뒤 추운 한 겨울 밤 방에도 못 들어오게 쫓겨나버렸단다. 어린 그 며느리, 할아버지 형제의 그 어린 딸은 부뚜막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다가 불기가 사라진 새벽 즈음에 그대로 눈을 감았다고 했다.
그 어린 딸의 아버지인 할아버지의 형제는 당신이 모을 수 있는 모든 가족들을 그의 딸이 모진 시집살이 끝에 명을 달리 한 그 마을로 불러 모았다. 마을은 급하게 조성된 작은 집성촌이 되어서 그 딸을 잃은 사람들은 그 딸이 살다 간 집 식구들을 마주칠 때마다 그가 눈에 보이지 않게 사라질 때까지 욕을 퍼부었다고 했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도 그 마을에서 일가친척들이 귀한 적송을 모아다가 지어준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내 아버지는 적송으로 지었다는 집에서 살았던 기억은 없다. 단지 어릴 때 친구와 함께 놀던 이웃에 있던 집이 적송으로 지은 집이었는데 어느 날 그 이웃집에서 친구와 함께 놀다가 친구의 아버지가 떡을 했다며 먹고 가라고 한 그릇을 내주기에 앉은자리에서 배불리 떡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몇 시간 뒤 이웃의 아주머니가 떡을 한 그릇 가져다주고 간 뒤에 그의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불러서는 이웃집에서 떡을 먹고 왔느냐 물었다고 했다. '네' 하고 대답하기 무섭게 눈에 별이 번쩍하고 마치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은 주먹질과 함께 발길질로 호된 매질을 당했다고 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기숙사나 군대를 포함한 생활 시설이 아닌, 잠시 들르게 되는 이웃집이든 낯선 어디서든 손님맞이로 내오는 음식이란 음식은 죄다 물 한 모금도 마실 수가 없게 되었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에도 가족이나 친한 사람이 아닌 낯선 사람과는 먹을 수가 없게 되었는데 그 후로 팔십여 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그날 그 떡의 의미를 알게 되었노라고도 했다. 관혼상제의 커다란 집안 행사 때 잔치를 열어 이웃에 떡을 돌리기도 하지만 새 집을 장만했을 때에도 마을에 떡을 돌리던 시절이었다.
내 아버지가 그의 부모님을 함께 기억하는 가장 좋았던 기억은 가을걷이가 끝난 뒤 초라한 사랑방에서 젊은 그의 부모가 가마니를 짜던 시간이다.
"볏짚으로 새끼줄을 꼬아서 가마니 틀에 엮어서는 가마니를 짰어. 아버지가 새끼줄 꼬는 게 재미나게 보여서 나도 해 보겠다고 했지. 아버지가, '너 새끼줄 꼬기 시작하면 앞으로 힘들어진다.' 한마디 하셨지. 난 그냥 새끼줄을 꼬았어. 서툴면 서툰 대로 아버지가 그 줄을 가져다가 가마니를 엮었는데, 아버지가 한 판을 만드는 동안 내가 제법 길게 새끼줄을 꼬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내가 꼬은 새끼줄에 몇 가닥을 더 꼬아 얹어서 가마니를 완성했어. 그 가마니를 내다 팔면 오 전을 받았나? 아무튼 그랬어"
내 아버지가 기억하기에도 그의 아버지는 많은 시신들을 거두고 또 거두었다고 했다. 일찍 돌아간 그의 아내, 곧 내 아버지의 어머니뿐만이 아니라 장질부사가 훑고 지나가 사람이란 사람은 발길을 끊어버린 이웃 마을에 살던 삼촌 집에서 홀로 살아남은 딸 하나를 데리고 온 뒤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집안으로 들어가서 그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했고, 재혼 한 아내가 데리고 들어온 작은 아들이 명을 달리 한 날 밤에도 그리했고, 마을에 병사와 사고사가 생길 때마다 불려 나가던 분이 당신 아버지였다고 했다.
돈이 생기기만 하면 노름방으로 달려가 밤을 새우곤 했고, 일가친척이 힘을 합쳐 귀한 적송으로 지어준 집도 노름빚에 넘기고, 아버지가 남의 집 소를 먹여서 얻은 송아지를 내다 팔아서 노름에 잃고, 그리고 집에 들어온 늦은 밤이면 당신 아내를 때리고 또 때리고 그랬다고 했다.
그 시절 그의 아버지는 척식 논 여섯 마지기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죽도록 농사를 지어다가 고리로 빌려온 장리쌀을 갚는데 쓰고 나면 또다시 밥 지을 쌀은 빚을 내어야 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들이 빌려주는 쌀에는 돌과 흙이 쌀보다 많이 섞여있어서 그것들을 다 걸러내고 겨를 거두어내면 반도 안 되는 양이 남았다고 했다. 시래기, 무, 나물가지 등등 섞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섞어서 묽은 죽처럼 끓여서 끼니를 해결하는 나날이었으니 날마다 배가 고팠다.
그러던 어느 날 농지개혁을 했다면서 그 아버지 앞으로도 논 여덟 마지기가 배당이 되었다. 집안에 누군가가 아프다고 해서 거기서 두 마지기를 팔았고, 그의 아들인 내 아버지를 결혼시킬 때가 되었을 때 혼사 준비를 해야 한다면서 나머지 논 네 마지기를 팔았다. 내 아버지가 그의 아버지에게 받은 것이라고는 운동화 한 켤레 뿐이었다고 했다. 아내 집에서 예단으로 보내온 두루마기를 입고 아버지가 사 준 운동화를 신고서 장가를 들어 처가에서 열흘 남짓 머무른 것이 가장으로서의 시작이었다.
공부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일에 쓰는 것인지를, 열심히 일 해 돈을 모으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도통 모르던 사람들이 그 시절 그 마을의 대부분이었으니 그 삶을 이어받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는 어쩌면 거대한 강물이 굽이굽이 물줄기와 물줄기를 엮어가며 흘러가는 어느 한 구석쯤에서 비틀거리며 흘러 내려온 비루한 한 조각의 나뭇잎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한 방울의 물로써도 살아지지 않는 시류의 구성원 중 하나. 그게 내 조상들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그 아버지가 당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떠오른 사람이 그였다. 아버지에게 생전 처음의 낯선 모양으로 타인을 대하던 사람에 대한 기억.
"어안이 벙벙했지. 아니? 꿩 알 여섯 개를 자기가 주웠는데 왜 거기서 반을 나를 주는 거지? 90살이 되도록 나는 그니를 자주 생각했어. 나였다면 말이다, 내가 그 사람이랑 길을 가다 꿩 알 여섯 개를 주웠다면 나는 그에게 반을 뚝 잘라 나누어 줄 수 있었을까? 아니, 아니... 난 절대로 그걸 나누지 않았을 텐데. 그니는 어째서 그걸 나에게 나눠주었던 걸까? 사람이 어떻게 마음을 먹으면 자기가 주운 꿩 알을 말이지 생판 처음 같이 길을 가는 동행에게 반을 뚝 잘라 나눠 줄 수가 있는 걸까?"
그게, 아버지가 당신 삶을 돌아보던 중 가장 처음 해 본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