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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고도. 의식과 무의식, 미움과 사랑의 사이

by 미 지

한 방송사에서 막대한 예산을 들여 담았다는 차마고도 6부작을 보던 날 나는 첫 장면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신비롭고 아름다우며 험준하기가 이를 데 없는 자연의 풍경에 압도되어 저절로 내뱉게 되는 '아!' 하는 탄식의 말 이외에 어떤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그저 자연의 풍광에 압도당하고 사람들의 삶에 감동하며 앉은자리에서 그 6부작을 단숨에 다 보고야 말았다.

차마고도는 '마방(馬幇)'이라 불리는 상인들이 말과 야크를 이용해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서로 사고팔기 위해 지나다닌 길이다. 해발고도 4,000m가 넘는 험준하고 가파른 길이지만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길로 유명하며 이곳을 통해서 문화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거대하고 거대해서 사람의 흔적 따위 티끌처럼 지워버린다 해도 아무 말 못 하고 승복해야 할 것만 같은 장대한 위풍. 그 까마득한 산과 산, 벼랑과 벼랑 사이에 사람들이 있고 마을이 있고 마을과 마을을 이어가며 물건과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이 길인 듯 길이 아닌 듯 나 있는 좁은 틈 사이로 하나하나 나타나고 하나하나 사라지고 있었다.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자연과 사람들의 모습들이 어떠한 가공 없이 어우러져 흘러가는 그 광활한 대장정을 보는 예닐곱 시간 동안 나는 어쩐지 초반부에 느꼈던 강렬한 감동과 신비가 조금씩 밀려나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감동들이 거의 전부 다 밀려나가 버리고 말았다는 확신이 드는 후반부에 다다랐을 때 천천히 그 빈자리에 올라와서 채워지고 있는 감정은 당황스럽게도 '분노'였다.

분노라니... 분노라니...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더더욱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나의 그 낯선 감정선에 대해서 나는 적잖이 당황을 해야 했다.

실크로드가 확립되기 이전부터 동양과 서양의 이곳저곳으로 마치 핏줄이 흐르는 것처럼 문명과 문화를 전파시킨 교역의 주체인 마방들은 그들 후손에 후손들의 삶까지 모두 다 한 줄기로 엮어서 피고 지고 피고 지고를 반복하는 단조로운 일생을 반복하는 가운데 ' 수많은 소수민족의 다채로운 문화를 남기고 있다.'라는 단 한 줄로 축약되는 역사적 기록에 그치고 있는데 그 무렵 인터넷 페이지에서 스치듯 보게 된 '예술가들의 예민하고 섬세한 시선과 감각에 우리 나머지 인류는 큰 빚을 지고 살아간다'는 표현을 본 뒤였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그때의 내 분노를 해석한다. 인류가 지고 있는 큰 빚이라.... 인류가 본 적 없고 들은 적 없는 어느 예술가의 감수성에 큰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면 역사의 한 페이지에 '수많은 소수 민족의 다채로운 문화'로 축약되는 역사를 남긴 그 마방의 후손들에게는 이미 치른 값으로 빚 따위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뒤섞인 채였다.

세상의 찬란하고 화려한 역사를 뒷바라지해 주던 조상들의 시절은 이미 저물어 그 소용은 다 하고 만 현대의 때에 마방의 후손들은 이제 그들의 다채로운 활약이 없어도 여전히 화려하다는 인근 국가들의 찬란한 문명과 문화와 예술 이야기를 오가는 바람결로만 전해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단조롭지만 고단하게 매일매일 변화 없이 반복되는 그들의 삶이 그다음의 세대로 역시나 변하지 않는 원형의 모습 그대로 전해져 가며 이미 수천 년 의 세월만을 쌓아왔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 같은 것은 애초에 생성시키지도 못한 채로 여전히 변함없이 이어져가게 될 운명을 가진 수많은 소수 민족들의 숙명 같은 도돌이표의 삶에 나는 깊은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미움이 쌓이면 고향을 떠날 마음을 먹는 걸까?

카뮈는 '희망'과 '절망'을 동일 선상의 같은 형태라고 설명을 했다.

그렇다면 '미움'은 '사랑'과 동일 선상의 같은 형태일지도 몰랐다.

고향을 떠날 만큼의 미움이 쌓였으니, 사랑만을 남겨놓고 떠나는 것은 아닐까?


희망과 절망은 같은 얼굴.

미움과 사랑은 같은 얼굴.

차마고도

고향을 떠난 이웃들의 이야기를 바람 속에서 들었네.

밤에도 길을 잃지 않는 곳.

길 아닌 곳이 없는 곳.

양 떼만큼 많은 사람들의 무리가 지나는 길은 비가 와도 젖지 않는다 했지.

집을 두고 백 리를 움직여 끼니를 벌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데 하루가 걸리지 않는다 했지.

하루 백 리를 걸어 가축들이 먹을 초원을 찾아선

몸을 눕힐 집을 짓고 한 끼 먹을 음식을 만들며

고단하고 힘든 내일을 살아갈 내 아이를 위해 노래를 부를 때

오늘의 바람이 엊그제 이곳을 떠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네.

내일은 내일 먹을 음식을 만들고

내일 묵을 집을 짓고

그다음의 내일은 내 아이들이 노래를 하는

우리에겐 그건 그냥 바람의 소리.

남겨진 사람도 떠난 사람도

저마다의 사랑과 미움을 담고

저마다의 희망과 절망을 담은

마치 그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들처럼 여겨졌다.

아무 감흥도 감동도 없이. 그런 것들 애초부터 필요도 없었다는 듯이. 단지 그렇게 하루씩 사는 일만을 물려줄 거면서 그 대단하지 않은 인생을 물려받을 자식들을 낳기 위해 짝을 찾아 가정을 이루는 일이 미안하지도 않으냐고, 그런 굴레 같은 삶의 대물림은 이제 그만두고 싶지 않으냐고 소리치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내면에서는 다른 외침도 함께였다.

'그래서? 그게 어때서?"


의식과 무의식의 한 덩어리 뭉치가 굴러가다 멈추어서는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엄마는 네 번째로 낳은 아이가 드디어 아들이어서 행복했다고 했다.

첫 딸은 며칠 데리고 있지도 못한 채 하늘나라로 보내버렸고 둘째였던 언니를 낳자마자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아들 낳기는 진즉에 틀렸으니 얼른 쫓아내라' 하고 말하는 걸 들었다고 했다. 나를 낳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 임신을 했을 때 주변으로부터 이번에는 아들인 것 같다고 미리 축하를 받았다고 했다.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

엄마에게는, 온전히 엄마만의 것인 축복이었다.

아버지에게도 드디어 조상 어른들께 대를 이을 자식을 낳은 것을 알릴 수 있는 자랑이었다.

어릴 때는 그게 무언가 커다란 의미가 있는 일인 줄 알았다. 남자, 아들, 사내....

식구들이 모여 앉아 밥을 먹을 때면 티 나게 동생 앞으로만 모아지던 맛있는 반찬들은 아마도 무언지 모를 대단한 '아들'의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가지며 자랐다. 그러다 그 '아들'이라는 것이 고작 그깟 생식기 하나만의 차이라는 것을 알던 날 나는 엄청나게 실망하기보다 고작 그깟 차이 만은 아니고 내가 깨닫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의 틀을 양보하면서 그 의미를 찾으려 애썼다. 어른들이, 그토록 엄청난 업적을 자랑하는 역사를 가진 사람들이 고작 다른 생식기를 가진 존재에 대해 그토록 안달을 하며 들썩이듯 며느리와 딸들을 향해 저주를 뿌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 같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결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파 볼수록 먼지투성이만 뒤집어쓰곤 하는 메마른 땅 속에 감추어 둔 보물이 아닌 설익은 가치관의 덩어리들 뿐이었다.

그렇게 자라고 어른이 되고 조금씩 달라지는 세상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숨을 쉬며 살다 보니 조금씩 사람들에 대해서 측은함 같은 것도 생기고 있다. 철없을 적 단지 '아들'이라서 대우받으며 자라던 동생에게 단지 '딸'이어서 구박받으며 자라던 나와 언니가 가끔 흉금 없는 농담 같은 진담을 전하기도 한다.

'가난한 집 장남이라는 게 짊어지고 갈 게 가난뿐인데, 뭔지도 모를 의무감을 태어나면서부터 이고 지고 살아내느라 네가 여전히 고생이 많구나!'


결혼이 그랬다.

대단한 삶의 약속이나 대단한 인생의 신비 같은 것이 숨겨져 있으니 꼭 결혼을 해서 일가를 이루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지는 것처럼 그때는 그렇게 여기며 살았다.

그 많은 고전에서 담고 있는 사랑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것이 그럭저럭 태어나서 그럭저럭 조금 티 나는 삶을 살다가 그럭저럭 사라져 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일 리가 없다고 여기며 살았다.


그 때문이었다.

차마고도, 그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면서 종국에 내가 뱉어내고 만 것이 분노뿐이었던 이유는.

내가, 무언지도 모르는 세상을 살면서, 무언지도 모르는 이상이 있을 것이라고 여기며 성스럽게 받아들이려고 애쓰던 삶의 모든 것들이란 게 말 되지 않는 사람들과 하루하루를 되지 않는 말을 하며 지내는 것뿐이라는 것. 그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 인간의 삶인데, 나는 어찌할 데 없는 환상에 쌓인 채로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들에게 엄마는 비록 찾지 못한 삶의 비밀이나 이상을 찾아보라고 세상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중이라는 자각 때문이었다.


살아가는 과정이 단지 이것뿐이라면 무엇 때문에 내 부모는 나를 낳았는가?

부모의 부모는 무슨 이상을 바라 나의 부모를 낳았는가?

나는 무슨 이상을 바라 부모가 되었는가?


양 떼만큼 많은 사람들의 무리가 지나는 길은 비가 와도 젖지 않는다 했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기 때문에 젖을 틈이 없다 했는데.

집을 두고 백 리를 움직여 끼니를 벌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데 하루가 걸리지 않는다 했지만 내내 돌아오지 않은 채로.

내일은 내일 먹을 음식을 만들고, 내일 묵을 집을 짓고

그다음의 내일은 내 아이들이 노래를 하는 그저 바람이나 들을 소리나 다르지 않은 것.


그래서? 그게 어때서? 그게 내 무의식의 소리였지만, 좀처럼 받아들이고 싶지가 않았다.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에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인생'과 '스스로도 완전히 충만한 인생' 역시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될 날이 오리라는 '의식'과 '무의식'이 동시에 말하는 예언을 품고 있을 터였지만 그 일은 당분간 오지 않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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