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맞이하다

2021년 12월 11일

by 미 지

새벽잠이 없어진 우리 부부가 안말을 향해 달리는 고속도로에 해가 곱게 뜨고 있었다. 차의 온도계는 외부 온도가 영상 3도라고 알려주고 있었는데, 여주 IC를 나간 후 보이는 마을의 땅과 집 지붕들에 서리가 내려 있기에 다시 온도계를 보니 영하 3도로 바뀌어 있었다.


밭에서 얼어가는 토마토와 고춧대를 걷어내고 가을 내내 마당에 떨어진 낙엽들을 한데 모아 EM 발효액과 부엽토와 퇴비 촉진제를 섞은 뒤 비닐을 덮어 모래주머니를 얹어두기 위해 모래를 파는데 언 땅이 좀처럼 모래를 내어 주려 하지 않았다. 지난 주말 아버지와 숯불 구이를 해 먹던 놋쇠 화로를 모래주머니와 함께 얹어 두었다.

중고 에어컨을 구입해서 설치했다. 이동비와 설치비를 합하면 새 에어컨 구입비나 다름없는 금액이었지만, 막상 새 에어컨을 구입하려면 여러 가지 비교를 해야 하고 최신형의 최신 기능을 찾다 보면 이 비용으로는 또 어림없는 금액이 될 터이기에 한 편으로는 잘한 일이라고 마음을 자꾸만 다듬는다.
에어컨에 설치할 와이파이 모뎀을 구입하는 것으로 새 에어컨에 대한 미련을 접어두면서.

추석 전 두 드럼을 채워두었던 기름보일러의 기름통을 확인해 본다. 이 겨울이 지나면 도시가스 보일러로 바꾸는 공사를 하려고 한다. 이만큼의 기름으로 얼마나 난방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휴대폰으로 원격 제어를 할 수 있는 기기들, 작은 뜨락의 흙과 풀과 나무들을 보면서 줄곧 나는 병원에 계시는 어머니를 떠올린다.
답답한 요양 병원 생활을 힘들어하시다가 부적응이 심해지셨어도 모시고 나오지 못하는 이처럼 딱한 사정이라니...
코로나로 면회도 외출도 허락이 안 되는 형편에, 부쩍 심해지는 편집과 섬망.
진통제가 없으면 화장실 오가는 일도 힘든 관절통까지.
여기서 같이 살자고 선뜻 모시고 나올 수 없는 형편에 가슴이 아리지만,
꽃 피는 따뜻하고 예쁜 내년 봄엔 꼭 모시고 와서 함께 지내보리라 마음을 먹으면서 하나하나 채워 넣는 일을 하고 있다.


에어컨을 설치하러 나온 두 분은 이 지역에서 제법 알려진 부부 기사셨는데, 마침 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요양 병원의 매점에서 어머니가 드시는 간식에 대해 전화 통화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년 봄이 되면 며칠이라도 모셔 볼 준비를 하는 중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은 부인 사장님은 치매 부모님을 외출이나 외박으로 모시고 나오면 다시 병원에 들어가셔서 적응하시기에 무척 힘들어하시니, 자식들 마음 편하자고 모시고 나오는 일은 하지 말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치매 환자를 모시는 일이 처음은 아니다. 오래전 시어머니를 짧게 모신 적이 있는데 그때 집으로 방문해서 어머니를 돌봐주시던 가사 도우미는 힘들어하는 나를 보며 '환자분인데 그 정도는 잘 넘겨야 하는 것 아니냐' 충고를 하시다가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이런 양반은 세상 처음 본다, 내가 얼마나 잘해주는데, 섭섭하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는 우리 집에 오지 않으셨다. 한 달 남짓 계시는 기간 동안 세 분의 도우미 아주머니들이 바뀌었었다.


치매 환자를 잘 모시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충고하는 일은 대단히 무책임하고 무례한 일이라는 것도.
에어컨 설치 회사 부인 사장님은 나에게 겪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조언을 해 주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도 되었다.
그렇더래도, 내년 봄, 내 어머니의 쉼터를 만드는 일은 지금 나의 꿈이기도 하며 어쩌면 더 나이 든 나를 향한 조금 젊은 나의 선물이기도 할 터이다.

집 앞에 있는 전봇대에 가로등도 있고 마을 cctv도 있다. 가로등과 전깃줄 덕분에 마음먹었던 이동식 주택을 옮겨 오는 일은 포기해야 했다. 전깃줄을 넘겨 이동식 주택을 세우려면 25톤 크레인이 필요하다기에... 콘크리트 다진 바닥 위에 텐트를 올릴까 온실을 지을까 천천히 생각해 보려고 한다.


안 오는 새벽을 둘러보러 나가 보았다.

산 옆이라 상대적으로 빛 공해가 적어서 새벽별이 맑게 반짝인다. 카시오페이아 자리, 큰 곰 자리. 어린 시절 마당에서 보던 그 별들이 반짝거린다.


별의 소리도 맑다.

앞 집 개가 평소 비어 있는 집 마당을 거니는 낯선 내 그림자가 보이는지 짖기 시작한다. 그 소리에 다른 집 개가 따라서 짖고, 또 다른 개들이 연달아 짖는 소리를 내다 잦아든다.

조용한 마을의 새벽.
별소리만 맑게 흐르고 있다.

휴대폰 카메라에
별은 담아지지 않지만
어둠이 담기고
달이 담겨서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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