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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밍보다 블루밍

by 미 지

앤 설리반 같은 특수교사가 될 수 있으리라고 특수교육 전공자들은 하나같은 다짐을 하며 공부를 하고 직장에 들어갈 것일 테지만 미담의 주인공이 되는 일은 전 세계에 한 둘이면 충분한 일이라는 걸 곧 알게 된다.


간호사도 나이팅게일을 꿈꿀 것이고 의사도 슈바이처 박사를 꿈꿀 것이겠지만 미담의 주인공은 좀처럼 허락되지 않고 그보다는 민원의 주인공이 되는 일이 훨씬 많다는 것을 머리로 깨닫기도 전에 몸으로 겪게 된다.


해마다 장애인의 날이 되면 장애를 가진 주변인들에 대해 실수하거나 차별하지 않기 위한 계기교육을 했었다. 발달장애(자폐성 장애)를 가진 반 친구의 당황스러운 모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담긴 애니메이션, 지체부자유로 등하교가 힘들고 학급에서 놀림을 당하는 친구와 동행하는 아이들의 감동 실화 등을 보고 난 후 감상을 나누는 일이 주가 되었었다.


딸아이가 아주아주 어렸던, 어린이 집을 다닐 때였다. 어느 날 교실에서 나오는 딸아이를 어린이집 현관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아이는 아주 경쾌하고 발랄하게 긴 복도를 뛰어서 '우다다다' 소리를 내며 내게 다가와 안겼다. 그리곤 자랑스럽게 말했다.

"엄마, 원장 선생님이 복도에서 뛰지 말래!"

복도에서 뛰지 말라는 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이 있었다는데, 평소 얌전했던 딸은 '복도에서 뛰는' 놀이도 있다는 신세계를 깨달아버린 것이었다.

그날부터 딸아이는 복도에서 뛰는 일을 몇 번 인가 더 했었다. '뛰지 말라'는 말의 의미와 '복도에서 뛰는' 일을 연결시키는 데는 몇 번의 주의가 필요했었다.


'장애를 가진 친구를 차별하지 마세요' 하는 장애인의 날 계기교육은 초등학교 1학년, 2학년 티 없는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새로운 인식의 세계를 만드는 말이 되곤 했다.

장애인의 날이 지나간 뒤엔 간혹 우리 반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와 초롱초롱 예쁜 눈빛과 티 없이 순수한 목소리로

"선생님, 여기가 '장애인'들이 공부하는 데 맞죠? 어디 있어요, 장애인? 아! 여기 있다! 안녕~"

하고 말하는 어린아이를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가끔 그런 상황에 상처받은 우리 아이가 그 말로 인해 눈물을 흘리는 일이 생겨버린대도, 그로 인해 상처받은 우리 아이의 부모가 교사의 부주의함에 대하여 강하게 항의를 해 오는 일이 생긴대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장애이해교육을 하지 않는 일?

어린 학생들에게는 다른 교육 방법을 선택해서 하는 일?

'장애'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고 아이들을 교육시켜서 장애학생이 차별받는 일이 안 일어나게 만드는 일?

동어반복이지만, 그때도 지금도 난 여전히 답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해야 할 일을 알지는 못하지만 양쪽의 순수와, 그 양쪽이 인식의 차이를 극복하고 마침내는 잘 어우러지게 되는 장래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넘어가고 있는 우리 반 아이들의 원망을 들어주고 견뎌내는 일뿐이었다.


내가 떠나온 특수교육의 현장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일.

상처받고 아파하고 원망하고 이해하고 그러면서 궁극에는 극복하는 과정.


척박한 땅에 거름을 뿌리고, 아마도 몇 년은 흙을 달래야 영양가 있는 작물 수확이 가능해질 것 같은 마당에 심어 놓은 식물들이 꽃을 피우고 있다.


비가 오면 빗물이 고여버리는 자리에 물길을 만들고 시든 잎들을 따주면서도 기대하지 않던 꽃이었는데 작은 한편 구석에서 그다지 힘들지도 않았다는 듯 무심하게 피어버렸다.


애는 쓰지만 아파하지는 말라고 이 꽃들이 말해준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열심으로 그루밍을 하고 있었는데 이 아이들은 그저 자신들의 시간에 내 의도와 관계없이 '블루밍'을 하고 있다.


앞뜰의 비 가림 공간을 자신들의 아지트로 삼고, 가끔씩 내가 놓아주는 밥을 자기들만의 순서대로 깔끔하게 나누어 먹으며 때로 나와 눈이 마주쳐도 그저 멀찌감치 바라보아주는 네 마리의 길냥이들도 길들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 몸의 모든 털을 돋아 세우곤 앙칼지게 째려보며 도망가던 고등어 태비 냥이, 치즈 냥이, 턱시도 냥이와 젖소 턱시도 냥이가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내가 보이지 않으면 살며시 나타나 밥을 먹는다. 가끔은 빈 밥그릇 앞에 앉아서 내게 밥을 달라는 듯 '야옹~' 부르며 쳐다보기도 하지만 딱 거기까지. 내가 여기 있는 날만 하루에 한 번 밥을 주는, 기대도 의무도 없는 꼭 그만큼의 거리를 두며 지내기로 한다. 너희들도 너희들만의 시간을 스스로 꽃 피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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