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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 지 Jun 16. 2022

사진 찍고, 다음!

Picture And Go!

차로 오르는 산 정상길을 찾아가다 보면 KBS, KT, 천문대가 있었다. 사찰과 군부대도 아마 차로 올라갈 수 있을 테지만 거기는 외부인에게 허락되지 않은 곳이다.


남편은 1년 동안 안식년을 보내면서 임금피크제로 80퍼센트가 깎였다는 월급을 받았다. 정년퇴직 날짜인 6월 30일이 지나면 그 적은 임금도 끊길 테고 몇달은  고용보험으로, 또 그 다음엔 국민연금으로 근근이 지내야 한다 허탈하게 웃으며 차로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 산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남산, 관악산, 화악산, 치악산, 월악산, 감악산, 일월산, 함백산, 소백산, 용문산, 유명산, 백운산.... 그리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산들을 찾아다니며 기름값도 비싼 이때 하루 500킬로미터가 넘는 드라이빙을 하며 산에서 산으로 이동을 하는 여행을 했다.


'사진 찍고, 다음!'

이렇게 후다닥 인증샷을 찍고 다음 목표지점까지 달리고 달리는 여행은 나의 여행 스타일과는 아주 달라서 난 가능하면 남편과 함께 하는 여행은.... 피하려고 했지만.... 퇴직 이후의 오랜 시간을 함께 해야 하는 사람이기에 이제 가능한 부분을 맞추어보려고 마음을 먹고 애써보고 있는 중이다.


조수석에 앉으면 차멀미를 하는 것처럼 나는 잠이 든다.  남편이 피곤해해서 내가 운전을 하겠다고 운전대를 잡으면 자신이 운전할 때 보다 더 바짝 긴장을 하니 딱히 할 일 없는 나는 그냥 2박 3일 1300킬로미터를 운전하는 남편 옆에 앉아있기만 하면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스름 어둠이 내렸고, 막 잠에서 깨서 무안해진 나는 이제 정년퇴직을 하게 될 남편의 마음 한쪽 허전함에게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할 거 같기도 했고, 평소 무뚝뚝한 아이들이 아빠에게 했던 말을 또 자연스럽게 전해야 할 거 같기도 했다.


"회사가 산 구석구석마다 다니면서 중계소와 송신소를 세우느라 엄청나게 고생을 했겠네. 산 꼭대기 중계소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소리 소문 없이 정말 힘들겠다."


"지금은 길이라도 좋지. 옛날에는 길도 좋지 않아서 한 번 근무하러 들어가면 며칠씩 산에서 못 내려왔어. 올라갈 때 며칠 먹을 식량을 챙겨서 올라갔어. 눈이라도 와서 다음 조가 올라오지 못하면 길이 풀릴 때까지 기약 없이 시간을 보내야 했어. 전기, 통신이 먼저 올라가고 방송시설이 올라가니까 전봇대 세운 군인들부터 다들 보이지 않는 데서 고생을 한 거지. 그에 비하면 나는 편했지 뭐. 사무실에서 전화로 현황 파악만 했으니까."


"딸이 그러더라. 문과 쪽 사람들은 힘든 일이 있으면 기승전결 맥락 관계 차근차근 설명하면서 긴 서술로 힘들다고 말한다고. 그런데 이과 쪽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열심히 일만 하다가 어느 날 '힘들다'한마디를 한대. 그건 정말 죽을 만큼 힘들다는 뜻 이래."


남편이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매일 아침저녁 전화통화로 현황 보고를 하던 신입사원 하나가.... 근무지에 올라가서 며칠을 보내다가.... 그만..... 다른 사람이 전화를 받기에 그 사람 안부를 물었더니.... 힘들었겠지.... "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기계만 보느라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지 않는다고 나는 자주 남편에게 투덜거렸었다.

방송사고라도 나는 날이면 나라 전체가 뒤집힌 듯 회사가 들썩거렸으니 말없는 기계에 민감하도록 온 정신의 기능을 단련시켜놓은 상태로 지내야 했을 남편에겐 사람들의 복잡한 마음의 흐름을 따라잡는 일이란 것이 무의미하게 여겨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이 몇십 년 전 적막한 업무  공간에서  상을 등진 후배의 사연을 말한다는 것은 그 후배를 정말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고 마음 깊이 슬퍼하고 있다는 표현이었다.


사람들과 복잡하지 않은 담소를 나누며 부족한 운동량을 채우기 위해 지금은 탁구 모임에 즐겁게 참여하고 있는 남편에 비해  출근하면서부터 퇴근할 때까지 말을 많이 해야 했고, 눈으로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잠재 기능을 자극하고 표현하게 하는 일을 해 왔던 나는 이젠 말하지 않는 시간을 보내는 일이 세상 편한 데다가 손 닿으면 닿는 대로 쑥쑥 자라는 식물들 보는 일이 더없이 즐거운 일이 되고 있다.


좋아하지는 않지만 익숙한 일을 하느라 삼십 년을 지내왔으니, 이젠 익숙하지 않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며 한 때를 보내보자고, 농담처럼 웃으며 여행을 마무리했지만....


남편은 정말 퇴직 전 마지막 여행이라며 다음 주 강원도 일정을 짜고 있다.


강원도 산 많이 갔는데.... 또 안 가본 산이 어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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