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기에 나는 너무도 가슴이 시려서 차라리 아무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촉법소년으로 보호 관찰 중인 어린 초등학생 한 명. 사랑으로 보살핌을 받으며 일상을 지내는 가운데 마음 한가운데에서부터 세상에 대한 신뢰를 쌓아나갈 수 있기를 바라는 목사님이 가정 위탁을 하고 계셨고 학교에서도 엄마처럼 감싸주실 수 있는 넉넉하신 인품의 담임선생님 학급에 배정을 해서 학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마음을 쓰고 있었다.
등교하면서부터 학교 일과를 마치기까지 아이는 학교 안 구석구석 마음 붙일 곳을 찾으러 다녔다. ADHD 성향의 아이는 하루 5,6교시의 수업시간 내내 교실의 자기 자리에 앉아서 학업에 집중하기를 매우 힘들어했으므로 담임선생님과 약속한 시간만 지나면 학교 이곳저곳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학교 안에만 있으면 괜찮다는 전제가 달린 허락이었기에 아이가 학교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동안 교내의 모든 구성원들이 보는 듯 안보는 듯 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이곤 했다.
그럼에도 아이는 마음의 결핍감을 채울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어설프게 말이 통하는 또래의 우리 반 아이를 만나자마자 마음에 들어 했고 거리낌 없이 우리 교실에 들어와 나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다가 일반학급에는 없는 컬러풀한 수업 교구재에 흥미를 보이면서 오랫동안 이 교실에 있어도 되는지 물었다.
담임선생님과 연락해서 아이가 우리 반에 오고 싶어 할 때 하루 한 시간 정도를 함께 보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첫 시간에 아이는 교실 창 앞에서 예쁘게 꽃대를 올리고 있던 카랑코에 화분을 실수로 깼다.
도자기 화분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는데 아이는 얼음장처럼 새하얀 얼굴로 자기가 깨뜨린 화분을 쳐다보았다. 난 큰 소리로 말했다.
"00아, 안 다쳤어?"
그리고 여전히 얼음처럼 서 있는 아이 옆에 가서 부서진 화분 조각을 치우며 말했다.
"와! 너 안 다쳐서 정말 다행이다. 화분 같은 거 하나도 안 중요해. 그런 거 깨지는 건 아무 일도 아니야. 00이 너만 안 다치면 된 거지!"
그리고 3일이 지나지 않아서 위탁 목사님이 오셔서 아이가 우리 반에 오는 일은 중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권유를 하셨다. 우리 반 아이들이 그 아이로 인해 받게 될 상처가 그 이유였다.
지난 3일 동안 아이가 우리 반에 와서 보인 행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그 자신에게도 나와 우리 반 아이들에게도 힘든 일들의 연속이었다.
왜 몰랐겠는가.
학교의 모든 구성원들과 위탁 목사님이 그 이유와 그 대처법에 대해서 왜 몰랐겠는가.
아이는 생전 처음 들어본 '너 안 다쳤으면 된 거야'라는 말에 위로보다 더 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아주 도전적으로, 나에게 얼마만큼의 잘못된 행동을 '괜찮다'라고 해 줄 수 있는지를 확인받아야겠다는 듯이 찾아왔을 것이었다.
열 살 아이가 그동안 쌓아 온 세상의 차가움을 위로받고 싶어 내게 찾아오는데 정말 필요한 것은 준비되어있지 않았다.
아이가 마음껏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낼 수 있는 시간과 공간.
상처받고 상처 주지 않으면서 마음껏 소동을 부릴 수 있는 공간과,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해소의 시간. 그것을 견뎌 내 줄 수 있는 사람들....
우리 반 아이들을 위해서 그 아이가 우리 반에 오는 일은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다.
지금도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차가운 마음으로 시간을 보낼 때 본 영화가 그것이었다. '디태치먼트'
차갑고 우울하고 막막한 실제 학교 현장의 이야기였는데 난 그 쇼킹하도록 차갑고 공허하고 암담한 이야기 전개에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
주인공 헨리가 한 발 떨어져서 '힘듦'을 '읽어'주던 학생에게 서툴게 다가가는 결말과 달리 나는 어쩌면 '적당한 거리두기'를 하는 것이 더 유용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결심을 그때부터 하게 되었다.
인근 학교에 시간강사 구인 공고가 3차까지 올라온 것을 보고 채용신청서를 제출했다. 3차 구인공고는 SOS 신호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으므로 어쩐지 꽃과 나무들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내 신선놀음이 약간 미안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단 5일 동안의 짧은 기간이었기에 큰 부담 없이 아이들과 수업을 해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차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재활원에 방문해서 수업을 하는 순회수업을 주로 했다.
날씨는 화창하고 아직 덥지 않아서 잘 꾸며진 정원 교실을 산책하는 시간을 아이들이 참 좋아했다. 좁은 교실에서 수업을 하다가 휠체어를 밀면서 건물 밖으로 나가면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기쁜 웃음소리로 행복해했다.
한 걸음 떨어져서, 내가 해 왔던 일들과 내가 만나왔던 아이들을 보는 일.
지나온 시간들을 한순간 한순간씩 떠올려가며 다른 시각으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등산을 하다 보면, 힘들게 헉헉거리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나를 보며 하산하는 분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었다.
'얼마 안 남았어요. 조금만 가면 돼!'
처음엔 그 말이 정말이라고 믿었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리고 '아직 갈 길이 한참 남았어요.' 하는 말보다는 '얼마 안 남았어요'라는 말이 진심을 담은 응원의 말이라는 것을.
일주일의 짧은 시간강사를 마치고 다시 백수로 돌아온 나는오늘도 열심히 시간을 달리는 현장의 후배 선생님들과, 애쓰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의 학생'들에게 진심을 담은 응원을 한다.
"최선을 다 하고 있는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하루하루가 꼭 넘치는 보답으로 돌아오게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