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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우서우아빠 Dec 02. 2023

아들이 무, 배추 뽑아온 날

이날은 무, 배추로 대동단결

아들이 어린이집에서 무, 배추를 뽑아왔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다용도실에서 1주일 동안 숨어 지내던 무, 배추를 예쁘게 요리해 주기로 마음먹고 간단한 밑반찬을 만들기로 했다. 겨울 무, 배추는 그냥 먹어도 맛있는데 얼마 전 교장선생님께서 주말에 직접 짜서 주신 들기름이 있어 간단하게 나물 반찬이랑 배춧국을 해서 먹기로 했다.

운명의 장난인지 오늘따라 채칼이 보이지 않는다. 안전상의 문제로 애들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긴 했는데 그곳이 어디었는지 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그냥 어느 정도 간격 맞춰서 썰은 다음에 어슷 썰기로 최대한 얇고 길게 무를 썰고 배추도 알배추랑 이파리 부분을 구분해서 손질한다. 어차피 요리해도 아이들은 잘 안 먹고 어른들이 먹을 가능성이 높기에 적당한 크기와 모양을 갖추어 먹기로 한다.

아이들 음식 위주로 만들다 모처럼만에 무생채를 만들려니 냉장고 속에서 숨죽이고 지내던 고춧가루와 다진 마늘의 환호성이 들리는 것 같다. 마치 토이스토리 만화영화에서 주인님의 놀잇감이 되지 못하다 느닷없이 선택당한 조연 장난감들 같다고나 할까. 이를테면 포테이토 아저씨나 렉스 정도? 그렇게 갖은양념과 설탕, 식초 등으로 얼렁뚱땅 10분 만에 무생채를 만들고 남은 무는 간장베이스의 무나물을 만들었다.

아이들이 그래도 무나물은 어느 정도 먹기 때문에 간장, 설탕 베이스로만 해서 간단하게 숨이 죽을 정도로 볶아서 만들었다. 막판에 약간 모자란 듯해 간장을 살짝 더 부어서 색깔이 많이 진해진 게 아쉽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부지런히 접시에 담고 바로 다음 반찬으로 넘어갔다. 아까 손질해 놓은 배추를 적당한 크기로 썰고 물을 냄비에 부은 뒤 끓인다. 물이 끓을 동안 방금까지 무 요리를 하면서 사용했던 집기류를 설거지하고 꺼냈던 양념들도 다시 냉장고에 넣는다. 무려 2년여를 군대에서 하루 16시간 꼬박꼬박 해왔던 일이라 뒷정리는 기계처럼 이루어진다.

물이 끓자 냉장고에서 된장을 대충 눈대중으로 한 숟갈 퍼서 넣는다. 내가 평소에 된장국 먹을 때 보는 색깔과 비슷할 정도로 넣으면 된다. 그 이후 물이 한 소큼 더 끓으면 아까 썰어둔 배추를 넣는다. 배추가 곤죽이 되지만 않으면 먹을만하기에 충분히 끓을 때까지 놔두고 급하게 아가들 식탁을 세팅한다. 남은 무와 배추를 소분하여 냉장고에 넣고 국 간을 한 뒤 보험으로 부쳐둔 계란 프라이와 함께 저녁식사 한 상을 차렸다.

무나물과 무생채, 배추된장국은 결론부터 말하면 아가들의 취향은 아니었던 듯하다. 예의상 한 입만이라도 먹어줬으면 좋겠는데 오늘 밥상의 주인공은 계란 프라이가 전부였다. 결국 무, 배추 반찬은 고스란히 나와 와이프의 반찬이 되었고 우리는 나름 맛있게 만족하면서 먹었다.


내년 무, 배추 요리는 좀 더 업그레이드해서 제공해야겠다. 그럼 한 숟갈이라도 먹어주겠지. 그때가 되면 우리 아가들도 조금은 더 커 있을 테니. 눈치도 좀 더 생기고 (머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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