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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 그리고 스펜서

스펜서 Spencer (2021)

by Yoon



spencer (2021)



익숙한 길도 시간이 지나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해버린다. 하지만 달라진 거리 역시 가만히 지켜보다 보면,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무언가 하나는 늘 남아 있기 마련이다. 그 조각을 마주한 순간, 변해버린 것은 거리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밀려온다.






스펜서 (spencer, 2021)는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샌드링엄 별장으로 향하는 길에서 시작된다. 그녀가 직접 운전해 도착하려는 이곳은 어릴 적 그녀가 자라던 동네였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길을 잃는다. 근처 카페로 들어가 묘한 시선을 견디며 길을 물어가며 가지만, 결국 여왕보다 늦게 도착한다. 시작부터 어긋난 이 방문에서, 다이애나는 스스로를 위로하듯 말한다.


“난 어렸을 때부터 항상 느렸어요.”



크리스마스이브, 크리스마스 당일, 그리고 박싱데이에 걸친 짧은 시간 동안 영화는 왕실과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그녀가 어떻게 고립되고, 자유를 잃고, 억압받아 왔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이 작품 속의 다이애나는 결코 무력하지 않다. 아버지의 옷이 걸린 허수아비를 향해 달려가고, 체중을 재기 싫어 거부하며, 윌리엄에게 사냥을 시키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는 모습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장벽에 끊임없이 맞서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감정을 억누른 채 이성을 지키며 목소리를 내기 위해, 그녀는 줄곧 애써왔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의 존재를 믿기로 결심하고, 두 아들과 함께 자유를 향한 짧지만 결정적인 여정을 떠난다.


영화는 다이애나의 심리 상태에 집중하며, 앞뒤 맥락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관객은 조용한 대사들과 섬세한 상징들을 통해 그녀의 상태를 이해해 나가야 한다. 극의 흐름은 의도적으로 느리며, 중요한 단서들은 비유와 은유 속에 녹아 있다.


초반 등장하는 왕실의 이해할 수 없는 전통들—크리스마스를 잘 보냈다는 증거로 몸무게를 재야 한다는 것, 혹은 한겨울에 히터를 틀지 않고 두꺼운 옷을 껴입어야 한다는 규칙—은 다이애나의 불만을 자아낸다. 그녀는 말한다. “그냥 재미로 생긴 거잖아요.” 이는 곧 다이애나가 받는 억압과 고통들이 결국 누군가의 ‘재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녀는 영화 전반 내내 시선과 판단, 가십 속에 존재한다. 카페에서의 사람들, 크리스마스 당일의 파파라치들, 그리고 무언의 식탁 위에서조차, 그녀는 이해받지 못한 채 홀로 남는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그녀가 자신의 방 커튼을 와이어 커터로 자르고, 그 커터로 자신의 팔에 상처를 내는 장면이다. 이는 고통을 통해서라도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고자 하는 그녀의 절박한 몸부림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고통을 끌어안은 채, 어린 시절 자신이 살던 집으로 향하며 다시 자신을 찾아 나선다.


다이애나는 왕실에 들어오며 해맑게 웃고 춤추던 자신을 잃었고, 또 잊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본모습을 되찾기 위해 몸부림쳤기 때문에 더욱 괴로웠다. 영화 초반, 길을 잃었던 그녀가 다시 길을 찾아내듯, 어쩌면 그녀는 단지 잠시 길을 잃었을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그리 친절하지는 않다. 그러나 왜 영화가 단순한 오락거리에서 나아가 예술이 될 수 있는지를 강하게 보여준다. 흔히 예능과 예술의 차이는 ‘어디에서 재미를 느끼도록 구성되어 있는가’에 있다고 한다. 스펜서는 단지 보는 즐거움에 머물지 않고, 해석하고 곱씹으며 이해하는 과정에서 더욱 큰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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