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애나 그리고 스펜서
익숙한 길은 시간이 지나면서 너무나도 많이 변해버렸다. 하지만 달라진 거리의 풍경을 지켜보다 보면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무언가 하나는 남아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보는 순간 변해버린 것은 오히려 나 자신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든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직접 차를 몰고 왕실 가족이 모두 모인 샌드링엄 별장으로 향한다. 어릴 적 그녀가 살던 동네였지만 그녀는 길을 잃었다. 근처 카페로 들어가 사람들의 무더운 시선을 견뎌내고선 길을 묻지만 여왕보다 늦게 도착한다. 시작부터 어긋나 버린 것에 위로라도 하듯이 그녀는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느렸다고 이야기한다. 크리스마스이브, 크리스마스 당일 그리고 박싱데이 이 3일에 걸친 스토리 타임은 왕실과 전통이라는 명분으로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자유를 앗아가고 고립시키고 억압해왔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는 무력하지 않았다. 초반 그녀는 이미 늦었기에 아버지의 옷이 걸린 허수아비에게 뛰어가는 모습과 비록 그녀의 뜻대로 이루어지진 않았으나 몸무게를 재기 싫어 거부하던 모습 그리고 왕세자 찰스에게 어린 윌리엄에게 사냥을 시키지 말아 달라는 모습 등에서 그녀는 무력하다기보다 그저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장벽들에 끊임없이 부딪히며 살아가고 있으며 이성을 지키며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내세우는 것을 참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존재를 믿고 자신의 아들들을 데리고 끝이 보이는 자유이지만 그래도 자유를 누리러 나설 수 있었다.
이 영화는 그녀의 심리상태에 가장 큰 초점을 맞추면서 진행된다. 앞 뒤 상황은 그저 넌지시 주어지기만 하며 관객들은 대사와 사소한 장면들을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 극의 흐름은 눈에 띄지 않게 천천히 이루어졌으며 그녀를 이해하기 위한 대부분의 중요한 단서들은 비유와 상징으로만 자신의 모습을 간간히 드러냈다.
영화 초반부 왕실의 이해할 수 없는 규칙들, 크리스마스를 잘 보낸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몸무게 증량하기와 추운 겨울날 히터를 틀지 않고 옷을 두껍게 껴입는 이런 행위들은 모두 재미를 위해 생겨났다고 다이애나는 불평을 한다. 이는 다이애나가 받는 모든 제약들과 파파라치들로부터 받는 고통들이 결국 단지 다른 누군가의 재미를 위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던져준다.
영화 초반부부터 그녀는 모든 시선과 판단 그리고 가십 속에 존재한다. 길을 물으러 들어간 카페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과 웅성거림, 크리스마스 당일 다이애나의 모습을 담기 위해 모인 파파라치들과 기자들, 그리고 왕실 가족들의 소리 없는 식사자리에서 그녀를 향한 측은의 눈빛 혹은 이해할 수 없다는 다수의 눈빛들 사이에서 그녀는 홀로 존재하는 모습들을 계속해서 보여주며 그녀의 외롭고 불안할 수밖에 없음을 정당화해준다.
가장 상징적인 장면으로는 왕세자의 명으로 꿰매어 놓은 그녀의 방의 커튼을 와이어 커터로 뜯어내고선 그것으로 자신의 팔의 살에 상처를 내 그녀는 고통을 느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그녀는 팔에 상처를 입음으로 자신이 살아있는 존재임을 느끼고 왕실에서 도망쳐 자신의 어린 시절 집으로 가 자신을 찾아 나선다.
다이애나는 어린 시절 해맑게 웃으면서 뛰어놀고 춤추던 자신의 모습을 왕실에 들어오면서 잃었고 또 잊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다시 찾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기에 괴로웠던 것이다. 영화 오프닝 시퀀스에서 길을 잃었지만 다시 올바르게 찾아온 것처럼 그녀 또한 잠시 길을 잃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리 친절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영화가 왜 단순한 대중 오락거리가 아닌 예술로 치부되는지 알 수 있는 영화였다. 흔히 예능과 예술의 차이는 어디서 재미를 느끼게 짜여있는가를 통해 알게 된다고 한다. 영화 스펜서는 단지 보는 것에서 즐거움이 한정되지 않고 수많은 비유와 상징을 통해 해석하는 과정에서 더 큰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