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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Nov 18. 2022

힘 빠지는 글은 쓰지 말자

힘 빠지는 글은 쓰지 말자


   올해 초 결심한 일이다. 내게 글쓰기란 언젠가부터 한풀이에 지나지 않게 된 것 같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지금부턴 희망이 없는 글은 쓰지 말자. 자꾸 꺼내 보고 싶은 글만 쓰자.


   그 결과 반년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못 썼다. 이상할 정도로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안 들었다. 희망이 담긴 글을 쓰려면 나부터 즐거워야 하는데 일상에 치여 숨 가쁘게 사느라 그런가 싶었다. 결국 '마감'과 '원고료'라는 마법의 힘을 빌려 공제보험신문의 칼럼만 써왔다.


   그러던 와중에 친구가 올린 글을 봤다. 2~3년에 한 번 '귀양살이'라고 부르는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는 친구였다. 이번에도 휴가를 내고 타지에서 좋아하는 일했다는데, 그 종류가 인상 깊었다. 본인 허락 없이 인용하자면 "책, 술, 차, (익숙한) 음악, 햇빛, 초록초록한 것들, 풀냄새, (안에서 바라보는) 비, 커다란 물 (수영)"이 그것이었다.




   언제부턴가 난 생산적인 일에몰두해 왔다. 두 번의 이직으로 남들보다 뒤처졌다는 자격지심,  빨리 달려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다.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추동력은 놀라우리만큼 효과적이었다. 조금이라도 몸이 편하면 죄책감에 책상 앞에 앉게 됐고, 깊게 잠들지 못해 일찍 깼다. 회사에선 불쾌한 말을 들어도 속 없는 사람처럼 웃었다.


   그럴수록 자존감은 낮아졌다. 자기애를 담보로 빌린 추동력은 사채와도 같아서 웬만한 결과물로는 이자도 갚기 버거웠다. 젠가 원본을 완전히 먹혀버리기 전에 이놈의 실체와 대면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하나가 끝나면 다른 과제가 기다리고, 그게 끝나면 또 다른 과제를 해치워야 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였다. 힘 빠지는 글을 쓰지 말자는 다짐은 슬프게도 더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글을 쓰는 시간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해버린 탓에 "쓸모" 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 다름 아니었다. 쓸모 있는 글이란 남들이 많이 찾는 글인데 귀한 내용담을 깜냥은  되니 분위기라도 밝은 글을 쓰기로 한 거다.


   친구는 귀양살이를 통해 익숙한 자극을 끊어내고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덕에 내가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걸 싫어하는지, 어떻게 해야 건강하게 욕망을 충족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난 그가 앞으로도 지혜롭게 삶의 방향을 조정해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난 귀양살이 없이도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느낀 적은 없다. 생각해보면 그건 글쓰기 덕이었다. 마음이 복잡할 때 키보드 앞에서 손 가는 대로 두드렸다. 그 덕에 내가 느끼는 괴로움에 걸맞은 이름표 - 자격지심, 후회, 열등감 등등 - 를 붙여줄 수 있었고, 그게 어디에서 생겨난 것인지를 추적할 수 있었다.


   우리에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낭비라고 치부할 일이 아니다. 나를 감출 필요가 없는 안전한 공간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내 안에 뒤죽박죽 섞여 있는 정체모를 덩어리와 마주하고 차곡차곡 정리하는 일이다. 그래야 싸워서 이기든, 담담하게 받아들이든, 우리의 노선을 정할 수 있다. 그러니 결국 쓸모없는 시간이 아닌 것이다.




   잠시 방치했던 공간을 다시 가꿔보려 한다. 내게 글쓰기란 남들에게 보여주기 이전에, 내 속살과 대면하기 위한 공간이다. 이미 현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속이며 살아가기에 지면에서만큼은 솔직하고 싶다. 내 초라한 부분도 내가 좋아하는 부분도 모두 껴안으며 살고 싶다.


   당신도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면, 무심코 방치해 두었던 나만의 공간이 있지 않은지 찾아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다시는 그 공간을 쓸모로 재단하는 실수를 하지 않길 바란다. 죄책감을 느낄 일이 아니다. 당신에게 이로운 일은 타인에게도 이로운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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