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비참할 때 손 내밀어 준 사람
그런 사람은 평생 가슴에 남는다.
피가 났다.
이 날만 기다렸다는 듯 시뻘건 놈이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급하게 목욕바구니를 집어 들었는데,
손에 잡힌 건 면도날이었다.
군인 주제에 만 원짜리 질레트 면도기를 산 게 화근이었을까.
5중 면도날에 엄지손가락 살점이 깨끗하게 떨어져 나갔다.
피는 좀처럼 멈추지 않았고
두루마리 휴지 하나가 우습게 사라졌다.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거나, 하다못해 거즈로 지혈만 했어도 피는 멈췄을 거다.
그러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난 의무경찰이었고, 그 날은 MB정부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는 날이었다.
군인이라고 아픈 걸 마냥 참고 있으란 법은 없다.
오히려 사고가 발생하면 바로 보고하게 돼 있었다.
경위 계급의 소대장은 피에 젖은 손가락을 가만히 보더니 한 마디 했다.
"그러게 조심 좀 하지 그랬냐."
그러더니 자리에 드러누워 방귀를 뀌었다.
의무경찰 부대에는 '챙'이라 불리는 비공식적 직책이 있었다. 부대 안팎의 모든 살림을 챙기는 중간 관리자로 당시의 내 역할이었다.
출동을 앞둔 상황에서 '챙' 한 명이 빠지면 상당히 귀찮은 일이 생긴다. 업무분장을 다시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일이 빵꾸 날 수도 있었다.
그러다 소화기나 물 같은 걸 안 챙기기라도 하면
그 날은 부대 전체가 초상 치르는 날이다.
그래서 모두가 모른 척했다.
어떤 이들은 본인에게 일이 넘어올까 봐,
어떤 이들은 병사의 건강보다 당장의 일정을 무사히 넘기는 게 중요해서 모른 척했다.
솔직히 엄청난 상처도 아니었고.
대일밴드로 상처를 대충 감고 장갑을 꼈다.
규정을 지키려고 기계적으로 보고했을 뿐 특별한 조치가 있을 거란 기대는 없었다.
일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면 군대에 요양 왔냐고 한 달 내내 괴롭힘을 당할 것이 뻔했다.
그냥 내 몸이 상하는 게 나았다.
방패와 경찰봉, 무전기, 소화기를 챙기고, 부대원들을 소집하고, 인원을 체크했다.
마지막으로 우리 방귀대장 소대장을 모시고 광화문으로 출발하니 한 시간이 흘러 있었다.
흐른 건 시간 만이 아니었다.
장갑을 벗자 온통 피에 젖은 손이 보였다.
"선짓국 끓여 먹어도 되겠네." 회심의 드립을 날리며 피를 닦고 있는데
심심했는지 닭장차를 배회하던 정대웅 수경이 나를 봤다. 그는 곧장 모든 상황을 이해한 것 같았다.
정대웅 수경은 내가 들고 있던 근무상황판을 빼앗았고, PMP로 예능을 보며 낄낄대던 내 윗선임에게 던졌다.
"니가 해 이 씨발놈아."
어떤 경험은 문신처럼 살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다.
숨소리조차 검열당하는 감시와 억압의 공간에서,
조금이라도 자기 목소리를 내면 그 목소리가 완전히 거세될 때까지 온갖 가혹행위가 이어지던 공간에서
처음으로 집단의 규범 이전에 나의 존재가 존중받았던 기억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뚜렷하다.
전역을 한 달 앞두고 있던 정대웅 수경은 나 대신 방패를 들고 시위 진압에 나섰다.
소대장에게 업무분장을 바꿔달라고 얘기한 뒤에 내 역할을 모두 대신했다.
집회가 끝나고는 어디서 소독약을 들고 나타나 손에 부어줬다.
그제서야 고통이 느껴졌다. 살이 떨어져 나간 자리는 소름 끼치게 쓰라렸다.
그때 난 권위에 대한 공포는 감각조차 소외시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권위에 굴종하는 행위를 반복하면
폭력이 폭력인 줄 모르고 지나가는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도.
카리스마와 선의로 무장한 소수의 인물이 세상을 바꾸는 시대는 지났다.
그렇기에 난 정대웅 수경 같은 사람이 없어지길 바란다.
굳이 저렇게 멋진 놈이 나서서 "부끄러운 줄 알아라" 일갈하지 않아도
보통의 선의를 가진 보통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출몰해서
자기가 조금 손해보더라도 그만큼 타인을 생각해주는 세상이었으면 하니까.
그러나 나조차 여전히 그런 사람이 못 되었기에
아직 내겐 정대웅 수경이 필요하다.
어떤 게 잘 사는 건지 헷갈릴 때마다 10년 전 그 장면을 떠올리며 널 궁금해한다.
난 여전히 손해 보는 게 싫고, 권위에 쉽게 굴복하고, 남보다 내가 먼전데
너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여전히 잘 살고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