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어리 Aug 09. 2024

04 박제해 놓고 싶은 마음

유방암으로 인생역전 (4)

    똥 누기에 성공한 이후로 별 어려움 없는 평화로운 나날들이 지나갔다. 그나마 뾰족해지는 순간은 이틀에 한 번 수술 부위를 소독할 때다. 소독하러 오라고 간병인 선생님이 부를 때부터 전절제를 당한 오른쪽 가슴을 볼까 말까 하는 갈등이 시작된다. 소독하는 곳 바로 앞에 거울처럼 잘 반사되는 모니터가 있어서 눈만 뜨면 내 수술부위를 볼 수 있었지만 아직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입원 기간 내내 결국은 끝내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고작 그런 고민이 평화로운 병실생활을 밋밋하지 않게 했다. 


  마음 씨도 퇴원하고 목포 댁도 퇴원했지만, 나는 여전히 배액관에서 흘러나오는 배액이 줄지  않아 장기 투숙객이 되어 갔다. 산책길에 어떤 할머니 한분과  만난 적이 있다. 병원 바로 옆 요양병원에 계신다고 했다. 그 할머니는 서울의 큰 병원에서 수술을 했는데 환자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배액관을 매단 채로 이틀 만에 퇴원을 시켰단다. 강제 퇴원에 꽤 분개하며 며칠 째 병원에 있는 나를 부러워했다. 똥 누기에 성공한 이후로도 여전히 내 집 화장실에 가고 싶었지만 할머니의 경험담은 이 병원의 돌봄에 감사하게 했다.  간호사님께 최장기입원기록을 물으니 그 간호사님이 경험했던 사례 중에서는 18일이라고 한다.  18일 안에는 집에 갈 수 있겠지, 하며 내가 새 기록을 세우지 않기를 바랐다. 


  식판 위의 음식이 유독 맛없었던 어느 날 옆 베드 할머니의 혼잣말이 들린다. '나는 지은 죄도 없는데 왜 암에 걸렸을까.' 그 혼잣말은 병실 전체에 다 들렸으므로 모두 다 상념에 젖어 있을 테다. 암환자면 누구나 거쳐간다는 그 질문, 'why me [왜 내가 암에 걸렸을까]?'의 덫. 세상의 많은 현자들이  'why not [왜 너는 안 걸릴 거라고 생각하는데]?'이라고 말했고 나도 그 말에 공감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하루에도 수차례 'why me?'의 순간이 찾아온다. 처음 암이라는 소식을 동생에게 전했을 때 동생은 대번 ‘언니야, 이건 누구 탓도 아니야. 그냥 교통사고 같은 거야.’라고 말해줬다. 그 순간 그 말이 무척 고마웠고 큰 위로가 되었지만, ‘why me?’의 순간이 아예 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병실에서는 누구나 ‘why me?’를 겪고 있으므로 화제는 종종 우리들의 공통점 찾기로 흘러갔다. 나는 장기투숙객이었으므로 공통점 찾기도 여러 번 했다. 병실 안에는 과체중 환자도 있었지만 정상체중의 환자들이 더 많았다.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오랜 세월 좋은 음식만 가려 먹었던 사람도 있었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운동 마니아도 있었다. 스트레스가 많았다는 환자들이 많았지만 그것이 그렇게 큰 스트레스였을까요, 현대 사회에서 그 정도를 스트레스라고 하면 어찌 살아야 할까요, 하는 사람도 있었다. 성격이 급한 사람도 있었고 느긋한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딱 한 가지를 찾아내고 대화를 마무리하기 일쑤였다. '다들 열심히 사셨네요.' 그 말은 뭔가 위로를 주면서도 한편 ‘대충 살았으면 암에 안 걸렸을까?’하는 마음을 낳았다. 2015년 미국 존스홉킨스 의대팀 연구진은 암의 원인이 ‘불운’이라고 사이언스지에 발표를 했고 1년 뒤에는 반박 기사가 네이처 지에 발표되었다고 한다. 짧은 기간 있다 나가는 병원 병실에서 느슨하게 만나는 환자들의 직관이 그 수많은 내로라하는 연구자들도 못 밝혀낸 일을 어찌 밝혀낸단 말인가.


  병실에서 몇 차례 소득 없는 whe me 대화를 반복하던 그 시절 결심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나는 나에게 2차 피해를 주지 않기로. 첫 번째 화살은 맞았으나 두 번째 화살은 맞지 않기로.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 소중한 하루하루를 무의미한 why me 따위에 내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겠다고.


   아직도 why me? 에 대해서 뭔가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은 없다. 유전일 수도 있고, 불운일 수도 있고 스트레스나 영양불균형이나 환경독소 때문일 수도 있겠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함께 작용했을 수도 있겠지. 그게 무엇 때문이든 이미 왔으니 지금은 다른 의미로  제대로 된 why me를 차분하게 공부하고 있다. 이 공부는 면역력이 떨어지고 대사가 원활하지 않게 만드는 내 생활 습관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보는 과정이다. 내가 내 몸에 대해서 이렇게 무지하고 무관심했구나,를 깨닫는 과정이다. 그래서 지금은 좋지 않은 음식들을 먹지 않고, 신선한 제철 음식을 먹으려고 애쓴다. 혈당을 높이지 않게 식사한다. 몸이 요청한다는 느낌이 들면 단식을 할 때도 있다. 또 충분히 잘 자는 것과 운동에 우선순위를 두고 하루의 일정을 짠다. 되도록 좋은 생각들을 하며 살려고 한다. 무엇보다 일이든 운동이든 무리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쓴다. 그리고 어제와 같은 하루가 내게 주어지는 것에 깊이 감사한다. 내 손으로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내 발로 화장실에 가고 가족들과 날씨 이야기를 하는, 이전에는 사소해 보이던 일상의 순간들이 다 귀하고 감사하다. 동생이 말한다. 

  "언니야, 암에 안 걸렸을 때보다 언니가 훨씬 오래 건강하게 살 것 같아."

  그래 맞다. 이것 또한 암이 준 선물이다. 삶의 길모퉁이에는 뜻하지 않는 불운도 있지만, 또 상당한 은총도 있더란 말이지. 이 마음을 꼭 박제해 놓고 싶다. 




from 49세 9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03 수술 후 변비 사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