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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리 Sep 11. 2024

09 글쓰기가 나를 살리고 있다

글쓰기를 배우는 시간 (9)

   소설 속 쌍둥이들처럼 해 보자고 친구가 제안을 해 왔다. 얼마 전 같이 읽었던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소설 이야기다. 소설 속 쌍둥이들은 매일  글을 써서 자신들이 정한 규칙대로 글을 썼는지 상대방에게 보였다. 그즈음 글쓰기에 있어서 독자라는 존재가 얼마나 고마운지에 대해 절감하고 있던 터라 바로 그러자고 했다. 우리는 A4 1~2장 분량으로 매일 한 편의 완성된 글을 써서 보내고 상대방의 글을 읽고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서 합평을 했다. 그렇게 4주를 보냈다.


  날마다 마감이 있는 글을 쓰니 하루에 한편씩 글이 완성되는 것이 재미있다고 느끼면서도 종종 글쓰기가 위험한 취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에너지와 생활을 쭉쭉 빨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고 앉아서 서너 시간씩 꼼짝 않고 앉아 있고, 나도 모르게 쿠키를 집어 먹고, 매일 하던 명상이나 운동까지 빼먹을 때는 글쓰기가 나를 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암생존자인 자가 운동을 안 하고 과자나 집어 먹을 때인가 말이다.


 그러다가 내가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쓴 글에 내가 밑줄을 긋는. 책을 읽다가 기억하고 싶은 문장이 나오면 밑줄을 치고 거기에 오래 머무르는 건 이해되는 행동이다. 그런데 내 글에 밑줄을 치다니. 마치 다른 사람 글을 읽는 것처럼 말이다. 얼마 전 내가 쓴 글을 꺼내 본다.



그저 모두 함께 추는 춤처럼 


   청소를 하다가 낯선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고무로 만든 양말 같다고나 해야 할까? 이게 뭐지? 하고 한참 생각하다 기억해 냈다. 전국에 맨발걷기 열풍이 불던 무렵 내가 암진단을 받자 친구가 사보낸 것이다. “맨발걷기가 그렇게 좋대. 그냥 하기 힘들면 이거 신고 해봐. 발을 보호해 줄 거야.” 라며. 그걸 신지 않고도 맨발로 걸을 수 있었기 때문에  친구의 선물은 수납창고에 들어간 채로 잊혔다. 그 물건을 보고 있으니 벤치 할머니가 생각난다. 벤치 할머니가 이 고무양말을 신으면 그 하고 싶으시다는 맨발걷기를 할 수 있지 않으실까?


  벤치 할머니는 운동장에서 만난 이웃이다. 나는 저녁마다 집 근처 학교 운동장에 간다. 맨발로 천천히 운동장을 걷기 위해서다. 발바닥 전체로 땅과 만나면 갱년기의 열이 땅 속으로 쑤욱 빠져나가는 것 같고 더불어 마음이 시원해진다. 갖가지 생각도 가라앉고 호흡만 느껴지니 평화롭다. 명상의 시간이고 기도의 시간이다. 이 시간을 사랑한다.

  달포 전쯤이었다. 운동장에서 자주 봤던 할머니 한 분이 옆으로 다가오며 말을 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운동장 이라기보다는 운동장 가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는 걸 더 많이 봤던 할머니였다. 벤치 할머니가 묻는다.

“그렇게 걸으면 안 아프요?”

“아프기는 해요.”

“어떻게 참고 걸으요?”

“그냥 참고 걸어요.”

“맨발로 걸으면 좋소?”

“저는 좋더라고요.”

 내 대답이 짧은데도 벤치 할머니는 내 속도에 맞춰 걸으며 길게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몇 년 전부터 발바닥이 너무 아파서 여러 병원을 다녀봤는데 소용이 없었다. 어떤 약사님이 맨발걷기를 추천해 줘서 시도해 봤지만 너무 아파서 할 수가 없다. 운동장 한쪽에 있는 씨름장은 모래가 많고 고와서 할만해서 몇 번 해보기는 했다. 하지만 아들이 말하기를 모래가 많으면 길고양이들이 배변 장소로 사용할 거라면서 말려서 지금은 안 하고 있다. 맨발걷기가 그렇게 좋다는데 나는 못해서 너무 속상하다. 아줌마는 할 수 있으니 참 좋겠다. 이런 내용이었다.


  벤치 할머니의 긴 이야기를 들으며 운동장을 돌다 보니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어 있었다. 아끼고 사랑하는 명상 시간이 날아가 버린 것 같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말을 거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다고 굳게 결심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부터는 벤치 할머니가 없는 시간대를 피해 더 늦게 운동장에 나갔다. 그래도 종종 벤치 할머니를 만나곤 했는데 나와 친해졌다고 느끼셨는지 매번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네셨다.


  청소를 끝내놓고 저녁이 되자 고무 양말을 챙겨 들고 운동장에 나갔다. 벤치 할머니가 벤치에 앉아서 다른 할머니와 담소를 나누고 계신다. 다가가서 쭈뼛쭈뼛 양말을 내밀었다.

“저…어르신… 이거 신고 한번 걸어보실래요?”

“이게 뭐다요?”

“맨발걷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양말인가 봐요. 이걸 신으면 혹시 걸어지실까 싶어서요.”

  얼른 건네드리고 나는 대운동장 쪽으로 가서 맨발걷기를 시작했다. 조금 있으려니 벤치 할머니가 내 쪽을 향해 소리를 지르신다.

“어이~~ 나 좀 보시요! 나 걸어지요!”

 그러더니 운동장을 가로질러 내 쪽으로 오신다.

“안 아픈 건 아닌디 그래도 걸어지요. 세상에~ 이런 좋은 걸 어디서 구했소?”

“저도 친구에게 받은 건데, 어르신 생각이 나서 가져와 봤어요.”

“고맙소이. 세상에~ 병은 소문내라더니 이런 일도 다 생기요잉~ 고마버서 어째야쓰까~”

  벤치 할머니는 그 후로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고무 양말을 신고 걷는 시간이 더 많아지셨다. 열심히 운동하시는 모습을 보니 ‘나는 다른 사람에게 절대 먼저 말 걸지 않겠어’라고 했던 결심이 귀퉁이부터 조금씩 바스러진다. 돌아보면 어딘가 서늘한 데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절대 폐 끼치지 않아야겠다는 이런 류의 결심 말이다. 너에게 폐 끼치지 않을 테니 너도 나에게 폐 끼치지 말라는 것 같아서 서늘한 듯싶다.


벤치 할머니가 의식적으로 알고 한 것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어떤 능력을 발휘한 것은 맞다. 그 일은 마치 온 우주에 어떤 신호를 보내는 의식과도 비슷하게 느껴진다.  모르고 한 것이었어도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있던 사람을 알아보았고 말을 걸었고 결국은 운동장을 걷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운동장에서 벤치 할머니의 신나는 표정을 볼 때마다 폐 끼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우주 전체에서 자신을 떼 내려는 결심이 허망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그 신호들을 보내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살아가는 이웃인 것은 아닐까. 허망한 결심으로 몸에 긴장을 넣지 말자. 모두가 연결되어 추는 춤처럼 그저 자연스럽게 살자! 



   밑줄 친 문장을 다시 본다. 이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 문장을 만날 수 있었을까? 이 생각을 만날 수 있었을까? 글을 썼기 때문에 이 문장을 만났다. 만난 것이 반갑고 좋아 밑줄을 그었다. 글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이 사건은 이런 일이 될 수도, 저런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여러 가지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글로 써내니까 나에게 자연스럽게 살자고 말해 주는, 살아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저 문장을 만나려고 하루종일 노트북 앞에서 그렇게 끙끙댔나 싶다. 저 문장을 만나니 글 쓴 후의 나는 글쓰기 전의 나와 달라졌다. 조금은 더 나은 사람, 더 충만한 사람이 되어 있다. 이러니 글을 계속 쓸 수밖에 없다. 이 좋은 취미, 글쓰기를 계속하기 위해 일단은 살아있어야겠다. 운동장 다섯 바퀴 뛰고 와야지. 지금 보니 글쓰기가 나를 살리고 있다.





from 51세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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