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배우는 시간 (10)
5주짜리 글쓰기 클래스를 다닐 때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 다 있다고 호들갑을 떨었더니, 얼마 전에 친구가 지역 공동체 센터에서 하는 15주짜리 글쓰기 프로그램이 있다고 알려 줬다. 바로 신청했다. 이번에는 어떤 급우들과 합평을 하게 될까 설렜다. 첫 수업 때 16명의 수강생과 2명의 강사가 돌아가며 왜 이 수업에 오게 되었는지를 말하는 방식으로 자기를 소개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글을 쓰고 있는 분들이 많다는 인상을 받았다. 수강생들의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서인지 강사는 한 문장 쓰기를 시켰다. 쓴 글을 낭독하는 시간에 ‘저들의 출현은 골몰길을 궁정의 뜰로 변모시킨다.’, ‘우리 집에는 슈퍼맨이 없다.’와 같이 한 문장만으로도 호기심을 자아내는 분들이 있어 퍽 기대가 되었다. 배움은 교사뿐 아니라 급우들에게도 넘쳐나는 것이므로.
한 줄 낭독이 끝나자 강사가 말했다. “여기 계신 분들은 글쓰기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없으신 것 같아요.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 좋기만 한 일일까요?(모두 웃음) 다음 주에는 그것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자신에 대해 2 문단 이상의 글을 써 오세요. 나에 대한 나의 생각을 쓰는 겁니다. 글로 하는 자기소개라고 하면 될까요? 다섯 분의 글만 스크린에 올려놓고 같이 공부해 봅시다. 다섯 분은 자원해 주시면 좋겠고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섯 명이 넘는 급우가 손을 들었다. 정말 두려움이 없는 분들이 모여 있는 클래스인가 보다. 강사는 한 줄의 글만 보고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집에 와서 숙제를 하기 위해 노트북 앞에 앉았지만 쉽게 두 문단이 써지지는 않는다. ‘자기소개’라는 글감이 어렵다. 살다 보면 종종 하게 되기는 해도 매번 어렵다. 자기소개는 왜 이렇게 어려울까. 마리 님이 떠오른다. 글쓰기 클래스에서 내 맞은편에 앉으셨던 분이다. 자기소개 시간에 “글을 쓰기만 하고 낭독하지 않아도 되나요? 글을 낭독하고 나면 발가벗은 느낌이 들어요. 부끄러워서 돌아다닐 수가 없어요.”라고 말씀하셨는데 강사가 다섯 명의 자원자를 받는다고 할 때 손을 번쩍 드셨다. 나는 마리 님처럼 손을 번쩍 들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마리 님이 보여준 모순이 낯설지 않다. 드러내기 싫다면서 나를 드러내는 일 그 자체인 글쓰기를 하고 싶어 하니 말이다. 얼굴을 가린 채 ‘날 좀 보소’하는 꼴이다.
이 글쓰기 클래스 이름이 ‘날 좀 보소- 글쓰기 클래스’이다. 글은 글쓴이를 담고 있으며 글쓰기란 것 자체가 ‘날 좀 보소!’라는 행위라는 선언이리라. 이 클래스의 수강생이라면 얼굴을 가리지 않은 채로 ‘날 좀 보소’ 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도 왜 나는 얼굴을 가리고 싶은 것일까? 원래 가진 기질 자체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식구들 밥 해 주는 틈틈이 글쓰기 클래스에 다니는 평범한 주부의 글을 ‘날 좀 보소’하려니 목소리가 기어들어가기도 한다. 내 글쓰기를 방해하는 가장 큰 내면의 소리는 ‘그런 소소하고 시시한 얘기, 써서 뭣하게.’이다. 자기소개글도 ‘시시해!’에 탁 막혀 있다.
그동안 글숙제를 하다 막힐 때는 강의노트를 뒤져보곤 했다. 이번에도 강사가 했던 말 중에서 인상 깊은 문장들을 적어 놓은 노트를 연다. 다음 문장이 나를 붙잡는다. “내가 대단한 사건의 주인공이 아닐 수는 있지만 내 삶의 유일한 주인공입니다. 좋은 글은 ‘나’를 담고 있습니다. ‘나’를 담은 이야기를 하면 됩니다.” 맞는 말이다. 식구들 밥 해 주는 틈틈이 글쓰기 클래스에 다니는 내 삶이 평범하기는 해도 그런 삶의 유일한 주인공은 나다. 내가 쓰지 않으면 이 이야기는 태어나지 못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일종의 사명감마저 든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일단 한 문장을 써본다. ‘나는 주부다.’ 써 놓고 보니 ‘주부’라는 단어에 시선이 오래 머문다. 이 단어에 머무르는 기운을 풀어내 보자.
'주부'. 나를 소개할 때 제일 먼저 말하고 싶은 단어다. ‘한 가정의 살림살이를 맡아 꾸려 가는 안주인’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 이 단어가 퍽 자랑스럽다. 51세나 되었지만 스스로 인정하는 주부 타이틀을 단지는 2년밖에 안 됐다. 내가 50살 가까이 되도록 우리 집 주부의 역할을 했던 이는 모친이었다. 우리 모녀는 홀어머니와 K-장녀 조합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처럼 ‘헌신과 희생의 아이콘인 엄마와 그런 엄마에게 깊이 감정이입하는 착한 딸’의 성격을 띠었다. 우리는 서로를 아꼈고 사랑했다. 생활에서도 정서적으로도 깊이 밀착되어 있었고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부모형제도 남편도 없이 외로웠던 모친은 시집가는 큰딸에게 같이 살자고 했고 착한 딸은 그러자고 했다. 천성이 부지런하고 야문 손재주를 가졌던 모친은 딸을 돕기 위해서, 공짜로 살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딸의 살림을 도맡아 했다. 처음엔 서툴러서, 어떤 순간에는 편해서, 어떤 순간에는 그것이 효도인 것 같아서 내어드렸던 주도권은 그러지 않아야 할 순간에도 모친의 손에 있었다. 딸이 내 살림은 내가 하고 내 아이는 내가 키운다고 할 때마다 모친은 그러면 나는 뭘 하냐며 곤란해했다. 그때마다 모친에게 들은 ‘넌 못해. 이리 나와 봐. 내가 할게.’라는 말이 딸은 제일 아팠다. 모친 입장에서 그것은 딸을 위한 지극한 사랑과 헌신이었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지극한 성실성이었다. 그러므로 ‘엄마가 내 인생을 살아버리면 내 인생은 없어져버려!’라는 말을 모친은 이해하지 못했고 ‘넌 못하니까 내가 도와줘야지.’라고만 답했다. 딸은 억울했다. ‘나도 실패할 기회가 필요해요. 난 실패할 기회조차도 없었으니까 당연히 못하죠.’
이런 싸움을 20년이나 했다. ‘너는 친정 엄마가 다 해 주니까 너무 좋겠다.’ 또는 ‘ 나쁜 년, 친정 엄마가 살림도 다 해주고 애들도 다 키워줬는데 감사는커녕 한숨이라니’라는 말을 남도 하고 내 속의 나도 해 대니, 나는 이 전쟁에서 철저히 외로웠다. 내 인생은 없어져가는데 모두 나를 보고 호강에 초 쳤다고 했으므로. 그 무엇보다 다루기 힘든 것은 죄책감이었다. 모친의 조장자 역할을 힘들어하면서도 나 또한 그런 삶의 공범자였다는 죄책감. 방임을 했다거나 욕이나 폭행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나 대신 열심히 살아주는 모친께 감사의 마음이 들지 않는 것에 대한 죄책감. 가끔 모친이 미국 사는 막내딸 집에 가서 한두 달 살고 오시는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느껴지는 깊은 평화와 이 기간이 더 길었으면 하는 바람에도 죄책감은 진하게 묻어 있었다.
2년 전 암을 경험하고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실감하고 난 뒤에야 죄책감이랑 그만 싸우고 모녀 중 한 사람이라도 죽기 전에 모녀의 삶을 분리해 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그래야 언제가 맞을 이별이 평화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각자 따로 사는 것이었으나 노모는 이제 혼자 살게 하기에는 돌봄이 필요한 나이였고 곁에 있는 유일한 가족이 나였다. 같이 살되, 서로의 삶을 존중하자고 설득해야 했다. “엄마, 그동안 고마웠어요. 이제는 제가 할게요. 내 살림이니까 내가 해야죠. 내 살림, 죽기 전에 내가 해 보고 싶어요. 언제까지 애처럼 살 수는 없어요.” 수차례의 애원과 눈물과 말다툼 끝에 노모는 노력해 보겠다고 했다. 다짐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기를 반복하면서 모친은 드디어 딸이 하던 일을 대신하거나 딸의 2미터 반경 안에 앉아서 딸의 다음 행동을 코치(모친 입장에서는 조언)하던 일을 그만두었다. 남들은 사춘기에 다 완수해 내는 과업을 나는 50이 되어서야 해낸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주로 소꿉놀이를 하고 놀았다. 우리 집 작은 방에 살았던 동갑내기 용한이랑 토방에 앉으면 거기는 내 부엌이 되었다. 붉은 흙은 고춧가루가 되고 마당의 풀은 채소가 되어 반찬을 만들어 돌접시 위에 얹으면 다섯 살 꼬마는 훌륭한 상차림에 혼자 감동을 받곤 했다. 이제 50살이 된 꼬마는 진짜 부엌에서 진짜 고춧가루로 내 김장을 담는다. 모친의 지휘가 없는 부엌의 시간은 어찌나 황홀한지, 하루종일 하고 해질녘까지 해도 재미있기만 하던 소꿉놀이처럼 신이 난다. 실패가 많지만 거기서 오는 배움도 즐겁고 내 삶을 내가 꾸려가고 있다는 데서 오는 뿌듯함이 있다. 노모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도 자주 나온다. 하루 종일 부엌에서 노느라 주부 습진이 온 나에게 노모가 말한다. “넌 날 닮아서 피부가 약해.” 내가 답한다. “우리 어무이~ 약한 피부로 혼자 애들 키우느라고 고생하셨어요.”
“한 끼 해서 먹이고 나면 또 다음 끼니 해야 해. 지겨워 죽겄어.”오늘 시장 갔다가 채소가게에서 내 또래로 보이는 한 손님이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겨워하는 주부 생활을 이제야 즐기고 있다는 것이 사실 많이 부끄럽다. 평생 모친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안 하는 것이 효도인 줄 알았던 것이 부끄럽고 지금 할 수 있었던 일을 과거에 하지 못했던 것이 부끄럽다. 많이 뒤늦었지만 인생의 숙제 하나를 바로잡고 쓰는 단어라 ‘주부’라는 단어가 이렇게 귀하고 자랑스러운 단어가 되었다. 저는 주부예요,라고 소개할 때마다 이 단어를 얼마나 힘주어 소개하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렇게 이번주 숙제를 해냈다. ‘나는 주부다’라는 한 줄 소개가 이렇게도 펼쳐질 수 있구나, 싶어 혼자 박수를 쳤다. 그래. 나는 내 삶의 유일한 주인공이다.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릴 용기가 생긴다.
From 51세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