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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리 Aug 14. 2024

04 독후감 아닌 독후감

글쓰기를 배우는 시간(4)


독후감 아닌 독후감

   -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떠나보내며


 

    글쓰기 클래스 이번 주 숙제는 독후감 쓰기이다. 잘 됐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떼어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2~3년 간격으로 따로 출판되었다는 소설 3개(이하 1부, 2부, 3부로 칭함)가 합쳐진 합본을 샀는데 3부를 읽고 나니 혼란스러워 다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피해 할머니 집에 맡겨진 쌍둥이 형제가 주인공이다. 그들의 삶은 잔혹하고 고독하다. 즐거울 것도 없는 이야기를 도대체 몇 번째 읽고 있는 것이냐.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다. 어떤 일은 글을 써야 떠나보내진다. 글로 장례식을 치르고 치워놓지 않으면 아무 때나 불쑥불쑥 나타나는 통에 머릿속이 온통 좀비 마을 같을 때가 있다. 얼른 쓰고 보내버려야지. 요즘 수면의 질이 엉망이다. 팔 할은 이 소설 탓이다. 학대, 수간, 착취, 살인, 근친상간, 자살 같은 자극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속도감 있는 전개 방식도 교감신경을 자극하는지 매일 하던, 취침 전 명상도 잘 안된다. 간절하게 장례를 치르고 싶다.


  이번 주 수업 때 교수는 독후감을 쓸 때 자신이 어떻게 쓰는지 그 과정을 화살표를 따라가며 보여주었다. 요약하자면 대상 텍스트를 여러 번 읽는 것은 물론이고 관련 자료 및 다른 비평문을 충분히 읽고 소화시킨 후에 글을 쓴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수의 화살표 중에는 ‘베끼고 싶은 글 발견’이라는 대목이 있었다. 웃음이 났다. 독후감 쓰기란 관련 자료를 읽어가다가 ‘베끼고 싶은’ 거대한 봉우리를 만나더라도 끝까지 나만의 관점을 찾아내고 써내야 목적지에 도착하는 과정인가 보다.


   브런치에 도서명을 검색하니 끝 모를 글목록이 뜬다. 상단에 뜬 글 여러 편을 읽어본다. 줄거리와 간단한 감상 위주다. 책을 몇 번씩 읽은 나에게는 재미없다. 이렇게 고르면 안 되겠다. 자신만의 제목을 붙인 글을 읽어야겠다. 스크롤을 넘기다가  ‘나를 타인으로 밀쳐놓고 싶은 순간’이라는 제목에 확 끌린다. 브런치 작가 ‘에밀리’의 글이다.

  긴 독후감이었고 난 기가 꺾였다. 교수의 화살표에 등장했던 거대한 봉우리를 만나버렸다. 독후감을 쓰고 싶은 생각이 뚝 떨어져 버린다. 소설을 읽을 때 낭만적으로까지 느껴지던 서늘함을 언어로 명확하게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읽다가 혼란스러워서 여러 번 앞뒤로 넘기던 대목들을 다 설득력 있게 해석해 내고 있다. 세상에 이렇게 완벽한 독후감이 있는데 나까지 쓸게 뭐람. 봉우리에 압도되어 일어날 힘이 없다.


  겨우 힘을 내 보자면 에밀리의 의견에 쉽게 동의하지 못하겠는 대목이 있기는 했다. 에밀리는 쌍둥이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 소설 전체가 루카스가 ‘참을 수 없는 외로움 때문에 상상해 낸 거짓말’(540쪽)이라는 것이다. 내 마음은 끝까지 두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1부와 2부는 루카스의 거짓말이지만 3부에서 만나는 루카스와 클라우스는 두 사람 다 존재한다고 말이다. 작가가 3부에 ‘세 번째 거짓말’이라는 제목을 붙였으니 이 논쟁에서 에밀리가 유리하기는 하다. 그런데도 나는 두 사람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끌어모으기 위해 몇 번을 다시 읽고 있다. 도대체 나는 항복하지 않고 왜 이러는 것일까.


   답답해서 도서관에 간다. 작가 이름으로 검색하니  『문맹:자전적 이야기』이라는 책이 뜬다.  얇아서 단숨에 읽힌다. 먹먹해서 2번 멈추기는 했다. 전쟁으로 ‘내 나라를 떠나지 않았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더 어렵고, 더 가난했겠지만, 내 생각에는 또 덜 외롭고, 덜 고통스러웠을 것 같다. 어쩌면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문맹』,82쪽)라고 적힌 부분에서 한 번. 모국어인 헝가리어가 아니라 26살의 나이에 읽고 쓰는 법을 처음 배운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했다는 부분에서 또 한 번. ‘가장 슬픈 책들보다도 더 슬픈 인생이 있는 법’(471쪽)이라는 책 속 문장이 함께 떠올랐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작가가 쓰는 사람으로 살아줘서 고맙다.


   이 책을 소개해 준 친구가 자신의 독후감을 보내왔다. 좋겠다. 나를 이 구렁텅이에 들어오게 해 놓고 자신은 벌써 장례를 끝내다니. 친구는 쌍둥이가 글쓰기 연습을 하는 대목에 매혹되어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소설 속 쌍둥이들은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작문 연습을 한다. 예를 들어 ‘당번병은 친절하다’와 같은 감정이나 평가를 담은 문장을 쓰지 않고 ‘당번병은 우리에게 모포를 가져다주었다’(43쪽)라고 사실만 표현하는 글이 되도록 연습하는 것이다. 이 소설 전체 문장도 그런 식이다. 일어난 일을 간결하고 담담하게 쓰고 있다. 내 친구는 소설을 읽고 난 후 쌍둥이들의 연습 장면을 적용하여 자신의 글쓰기를 훈련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친구가 보낸 독후감은 이전보다 담백하고 명확하다. 읽은 책의 문체대로 써진 독후감이라니. 멋지다. 독서가 자신에게 남긴 흔적을 쌓아가고 있는 내 친구가 부럽다.


   같은 책을 읽은 나는 쌍둥이들의 문장 연습을 내 것으로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 내게는 이 문체가 서늘하다.  많은 이들이 칭송한다는, 이 소설의 문체가 힘들다. 가령 루카스가 극심한 상실감이나 고독이나 불안을 느낄 만한 상황인데도 그의 감정은 전혀 서술되지 않고 ‘토했다’(341쪽 외 다수)고만 나온다. 이 단어가 나올 때마다 나는 책장이 무겁다. 차라리 무섭다고 해. 괴롭다고 해. 외롭다고 해. 소리쳐주고 싶다. 독자에게  감정의 짐을 던질 전략으로 그런 것이라면 나는 그 덫에 걸려들었다.


   책이 내 친구에게 남긴 강렬한 흔적을 보고 나니 내게 남긴 흔적은 무엇인가 묻게 된다. 이 책을 읽는 며칠 내내 먹먹해서 잠을 잘 못 잔 것? 소설 안에서라도 제발 쌍둥이가 존재하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 소설은 어차피 허구니까 3부가 거짓인지 아닌지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쌍둥이가 존재했으면 좋겠다. 같이 견디는 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위안받을 때가 있지 않은가.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루카스와 클라우스의 깊고 깊은 고독일지, 작가의 깊고 깊은 고독일지 또는 인간 존재 자체가 가진 깊고 깊은 고독일지 모를 그것에 자꾸 머물러있게 된다. 그래서 내가 항복을 못하나 보다. 루카스의 거짓말, 소설 전체 서술자의 거짓말, 작가의 거짓말이 너무나 간절해서 이 또한 말려들었나 보다. 정신 차리고 보니 다 거짓이었어?라는 배신감도 잠깐 들었으나 읽으면 읽을수록 또 속고 싶다.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이 든다. 모든 외로운 이들이 평화롭기를. 감사하는 마음도 든다. 인간에게 글쓰기라는 행위가 있다는 것에.  

   젠장! 내가 지금 이러고 있다!  교수가 보여준 화살표의 흐름 속에는 ‘감정적 반응의 늪에 빠지지 말고 거리감을 확보할 것’ 같은 대목은 없었는데 나는 퐁당 빠져 있다. 소설가로서 이렇게 기가 막힌 설정을 해내다니 너무 멋집니다! 정도만 해도 좋겠는데 아직은 늪 속에서 허덕이는 수준이다. 기존의 훌륭한 독후감이라는 봉우리, 단순한 감정적 반응이라는 늪을 넘어내고 탐색하다 보면 목적지가 나올까? 적절한 거리감을 확보하고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고 내 관점이 생기면서 나만의 독후감을 쓸 수 있게 될까?



   하지만 더 잡고 있기에는 너무 힘든 소설이다. 우선은 짧은 편지 한 통으로라도 간소한 장례를 치러야겠다.         


 세상의 모든 작가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정지아 작가에게 그런다지요. 부모가 빨치산이라서 좋겠다고. 어떤 비운은 매혹적인 글감이 된다는 의미인가 봐요. 아고타 크리스토프에게도 그렇게 말할까요?  당신은 전쟁을 겪어서 좋겠네요. 모국어를 잃어버려서 좋겠네요. 어린 시절이 통째로 날아가 버려서 좋겠네요.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당신에게도 말하나요? 당신의 비극이 부러워요,라고? 그딴 말들의 멱살을 잡고 쏘아붙여 주겠어요.  “바보야! 글쓰기는 글감보다 글을 쓰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해!”

    소설 같은 건 쓰지 않아도 좋으니까 행복한 삶을 사세요,라고 말하려는 건 아녜요. 당신이 어떤 상황에 있든 글을 쓸 것이라는 것을 알아요. ‘쓴다는 것은 자살행위(670쪽)’라는 것을 알아차려도 쓸 테죠. 쓰지 않는 삶을 견딜 수 없을 테니까요. 그저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당신이 쓴다는 것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니까. 계속 계속 써 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정성스럽게 읽을게요. 자. 어서 쓰세요.  



From 51세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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