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두 번째 직장이었던 D사는 정부 정책에 의거 다른 계열사에 합병되었다. 1997년 말 IMF 경제위기 이후 정부에서는 30대 대기업들에게 계열사 수를 축소 조정할 것을 지시하였고, 재계 순위 30위 이내에 들었던 D그룹도 정부 지시에 따라야 했다. 1999년 초에 그룹 회장이 신년사를 통해서 정부 정책에 따라 D사를 다른 계열사에 합병시키겠다고 발표했을 때 모든 직원들의 머릿속에는 나름대로 주판이 돌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내 머릿속에서도 각종 시나리오가 돌아가고 있었다. ‘과연 언제쯤 합병이 될까?’ ‘흡수하는 계열사는 과연 합병되는 계열사의 직원들을 모두 승계할까?’ ‘처음에는 모든 직원들을 승계하는 모양새를 갖추겠지만 언젠가는 인원 정리가 있겠지?’ 내 머릿속에는 결정적으로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나는 화학제품 해외영업담당인데 흡수하는 계열사는 화학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회사라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합병 초기에는 모든 직원을 안고 가겠지만 결국 화학제품 담당자는 언젠가는 그만둬야 할 것이다.
나는 내가 먼저 사표를 던져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이제 직장 생활도 두 군데에서 해봤겠다, 해외영업도 6년 넘게 했으니 이제 독립해서 나의 개인사업체를 차려도 될 만큼 충분한 경험과 경력이 쌓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먼저 사표를 던지겠다고 결심한 더 큰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사업을 하다 보면 동종 업계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게 되는 평가가 매우 중요한데,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다니던 회사가 다른 회사로 합병이 되어서 어쩔 수 없이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어서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사업체를 차렸다는 평가를 듣는 게 싫었다. 나는 누구에 의해서 선택을 받거나 어쩔 수 없이 어떤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는 게 싫어서 나는 그러한 상황이 되기 전에 먼저 나 스스로 결정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 혼자 만의 착각이었다. 그런 평가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인데 나는 나 스스로 그들의 평가를 지레 짐작하고 행동했던 것인데, 그것이 내가 처음으로 나의 개인사업체를 운영하는 첫 걸음을 힘들게 만든 섣부른 결정이었다.
나름대로 오랫동안 깊이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 때 깨달았다. 남들보다 결정을 빨리 내리는 게 어떤 경우에는 경쟁에서 앞서가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경쟁에서 뒤지게 하는 섣부른 결정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좀 더 버텼어야 했다. 비록 D사가 계열사로 합병되기로 공식 발표는 났지만 그것이 실제로 집행되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한데, 그동안 회사에 남아서 버티면서 나의 개인사업계획을 좀 더 체계적으로 만들었다면 독립해서 개인사업체를 열고 초창기에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업을 함에 있어서 빠른 행동은 대부분 고객을 만족시키고 좋은 결과를 낳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기도 한다.
--- (2)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