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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로니 Apr 04. 2024

수험생 사회-내가 상처준 사람

실패로 끝난 나의 피트 수험생 에피소드 일기

스터디를 하면서 토익점수를 900점대까지 맞게 되었다. 하지만 토익점수를 끝내고 약학전문대학, 즉 PEET시험을 준비하려고 하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암담했다.

약대에서 전문대학원으로 제도 자체가 바뀌는 첫 시험이니 각종 설명회는 많았으나, 자기 학생으로 끌어들여 상업성을 높이려는 학원들만 많았을뿐 합격으로 이끌어줄 체계적인 시스템이 없었다.

마음이 가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가장 유명한 학원 종합반으로 들어가는 것. 

연령대는 다양했다. 이제 갓 입학한 풋풋한 새내기 20대 초반, 아이 둘 있는 얘엄마, 갓 퇴사한 직장인. 전문직에 대한 열망은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영원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그 안에서도 사회는 형성되었다.


“안녕하세요.”


붙임성 있어보이는 20대 여자얘가 말을 걸었다.


“네.. 안녕하세요.”

“수업내용이 많이 어려운거 같아요. 제가 문과다 보니..”

“전공이 뭔대요?”

“저 00대 경영학과 1학년이에요.”

“어머, 00대면 학교도 좋고 전공도 좋은데.. 굳이 이과시험을 공부해요? 그냥 대학교 졸업하고 좋은데 취업하시면 될거같은데.”

“부모님이 자꾸 이거 준비하라고 해서.. 근데 생각보다 너무 어렵네요. 그래도 여자직업으로 약사만한게 없다고 해서.. 한번 준비해보려구요.”

“좋겠네. 그래도 아직 어려서. 난 머리가 굳어져서 그런가. 내용이 잘 안들어오더라구.”

뒤에서 듣고 있던 나이 있어보이는 여자분이 말을 붙였다.


“언니는 어떻게 해서 이거 준비하게되셨어요?”

“미친 남편이 육아 도와주지도 않은주제에 나 혼자 얘 둘 키워놨더니 경제적으로 힘들다고 나보고 뭐라도 하라잖여. 누구 때문에 잘나가던 직장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살고있는데.. 애 둘 키우면서 10년 훌쩍가니 웬만한데 이력서 쓰지도 못하고.. 저 학생 말이 맞어. 여자가 직장생활하며 얘 키우긴 힘들고 자격증이 있어야 해. 그래야 남편들이 무시를 못한다니까?”

“언니 스스로 그만두셨구나.. 전 소기업 다니다 얼마 못가 짤려서 이거하고있잖아요. 대학교땐 잘나갔는데 대기업은 안받아주고.. 그나마 받아준 회사도 짤리고.. 인생 정말 암울해요.”


그 옆에 있는 30대 여성분도 맞받아치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학생도 20대죠? 어쩌다 이거 준비하게됐어요?”

“그냥 전공이 생물학이라.. 젊었을 때 한번 준비해보는 거라 생각해서 하고있어요.”

“젊을 땐 사실 놀아야 하는데.. 나이 들어서 놀면 힘들어요. 남자도 잘 못만나고.. 내가 학생 나이면 주구장창 남자 만나서 결혼할텐데.. 이젠 나이가 많아서 나 혼자 먹고살아야 하네요.”

“왜요? 언니 아직 이쁘신데.. 지금도 줄서지 않아요?”

“후후 30대 되니까 노처녀 취급 당하더라구요. 간간히 소개팅 들어온대도 기대이하인 놈들이고.. 그냥 저혼자 벌어먹으며 잘살자 생각하고있어요.”

“결혼하면 뭐하냐고. 남편이 아내를 여자 취급이나 하나. 진짜 집에만 있지 말고 뭐라도 해야 남편들이 와이프 무시를 안한다고.”


종합반 학원에서 만나 짧게 대화를 나눴지만 그 안에 대한민국 여성 현실이 다 함축되어있는 것 같아 씁쓸했다. 패기로 시작한 전문직 공부지만 꼭 붙어야 살아남을것만 같다는 부담감도 만만치 않았다.

학원 종합반 생활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회였다. 생물, 화학, 물리학.. 종합반 특징은 많은 과목들 중 잘 못가르치는 강사를 한명씩 집어넣은게 특징이었다.


‘휴.. 그냥 단과반으로 들을걸.. 내용도 어렵게 가르치고..’


휘발성은 어찌나 강한지 그날 공부한걸 당일 정리하지 않으면 다음날 새까맣게 잊어버린다. 게다가 종합반은 학생들에게 개인정리할 시간을 따로 주지 않고 기초반 기본반 심화반 하이클래스반 기출반 문제풀이반.. 어떻게든 학생에게 경각심을 일으켜 수업에 돈을 더 쓰게끔 만들었다. 마치 학원은 이 과정을 듣지 못하면 남들보다 뒤쳐진다는 가스라이팅을 수없이 했다.


“후.. 이게 학원인가.. 무슨 사이비 종교같아.”


엄마 카드로 수업비를 긁으며 한숨이 나왔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요령있게 골라내서 수업을 들었어야 했는데.. 그땐 이상하게 학원 탓이 되었다.)


‘더 독하게 공부해야 해.. 수업진행하는거에 비해 내가 너무 못따라가고 있어.’


“어? 수현씨. 이제 왔어? 잘됐다. 마침 나 점심 안먹었는데 같이..”

“저 먹었어요.”


30대 직장퇴사하신 언니가 반갑게 인사했으나 제대로 받지 않고 지나갔다. 언니는 조금 머쓱해하다 혼자 지하식당으로 내려갔다.


‘어제 고민있다고 같이 술마셔주느라 시간 다 썼는데.. 저언니만 아니었어도 어제 수업내용 다 정리했을텐데..’


머릿속엔 제대로 수업진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열등감, 남들에 대한 원망으로 분노가 쌓여 점점 꼬인 생각으로 사람들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수업날 언니가 초콜릿을 하나 들고 내 자리로 왔다.


“수현씨. 이거 먹고 공부해. 근데 요즘 나한테 좀 쎄한거같은데, 화난거라도 있어?”

“그런거 없어요. 다만 요즘, 너무 시간이 없단 생각이 들어서.. 저 혼자 공부하려구요.”

“아니 내가 수현씨 시간을 뺏으면 얼마나 뺏었다고 그래? 그때 나랑 같이 시간보내준건 고마운데, 그때말곤 없었잖아. 이렇게까지 뾰족하게 나올 필요있어?”

“누가 그렇대요? 언니야말로 공부에 집중하세요. 막말로, 저보다 더 급하신 나이 아닌가요?”

“뭐?? 아니 무슨.. 기가막히네 정말.. 말 다했어?”

“저한테 반말하지 마세요. 언니보다 어려도 저 성인이에요.”

“아니 수현씨가 말 놓으라며.. 아무리 시험 다가와서 예민해도 그렇지.. 내가 사람 잘못봐도 한참 잘못봤네. 앞으로 일체 신경안쓰고 말도 안붙일테니 어디 혼자 열심히 해봐.”

내 말을 듣다 언닌 도저히 못참겠는지 초콜릿을 바닥에 던지고 수업을 나가버렸다. 우리가 싸우는 소리에 주위 사람들은 한동안 웅성거리다 조용해졌다. 쉬는 시간엔 나를 째려보고 가는 남학생도 있었다.


‘후...’


후회가 막심했다. 금세 후회할 행동을 왜 저질렀는지. 분위기는 싸해지고, 나한테 살갑게 굴었던 주변 분들의 눈초리가 느껴졌다. 느껴졌다. 순식간에 나에 대한 평판이 달라졌음을.

하지만 수업에서 느낀 싸한 분위기는 엄습한 불길함의 시작일 뿐이었다.

난 그 후로 밥을 혼자먹고 공부도 혼자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공부내용에 대해 물어봐도 건성으로 답할뿐, 고립되었음을 느꼈다. 학원에서 언니한테 예의없게 굴었던 아이. 부끄러움은 둘째치고 외로움이 신체를 뒤덮였다. 

가슴이 고구마를 먹은것마냥 답답했다. 내 행동이 너무 후회되었으나 사과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안좋으니 설상가상으로 공부도 될리 만무했다.


‘휴.. 언니한테 잘했어야 했는데.. 그리고 그렇게 대놓고 싸울 필요도 없었는데... 대체 왜 그랬을까 내가..’


후회만으로 남은 수험생활을 채우기엔 갈길이 너무 멀다. 어떻게든 남은 시간만이라도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우선 다니던 종합반을 그만두었다. 집 근처의 대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며 스터디메이트를 구해볼 생각이었다.


‘언니, 저번에 예의없게 행동해서 죄송했어요. 너무 여유가 없었나봐요. 직접 뵙고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언니도 바쁘실거같아서.. 시험 꼭 합격하세요!!’

 이렇게 문자를 보내고 짐을 옮겼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내 잘못으로 벌어진 갈등이고 사과를 했다고 해서 타인의 용서를 구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친한 친구 사이에도 한번 벌어진 관계는 다시 회복하기 어려운데, 고작 시험을 위해 수험생끼리 만난 사이엔 작은 갈등이라도 벌어지면 거기서 더 메꿀수 없는 법이다. 시험 아니면 만날 관계도 아니었기에, 이 시험을 준비하다 갈등이 벌어진 사이라면 거기서 끝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 관계는 고작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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