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도 보도 못한 프랑스 해외영토 레위니옹 섬

어디 있고 누가 살고 있나

by 쌀미디

N와 만나기 시작한 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 크리스마스가 찾아왔다. 그는 가족들을 만나러 레위니옹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가족들이 레위니옹 섬에서 살기 시작한 지 좀 되었다고 하더라. 프랑스에서 크리스마스는 온 가족이 모여서 보내는 명절이다 보니 가족을 만나러 갈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가족들이 이렇게 먼 곳에 살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가 레위니옹에 도착해서 보내준 몇 장의 사진에는 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는 그와 조카들, 그리고 햇빛이 강렬한 풍경들이 담겨 있었다. 계속 이 사람과 만난다면 나도 언젠가는 가게 될 거라고 생각은 해왔지만 사실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오게 될 줄은 몰랐지.


N의 대부분의 가족들이 지금은 모두 레위니옹에서 살고 있긴 하지만 정작 그는 레위니옹에서 살아본 적은 없다고 했다. N의 아버지 쪽 가족들은 모두 레위니옹 출신이고, N의 어머니 가족들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타히티 출신. 진짜인지 농담인지는 모르겠지만 N의 부모님은 결혼한 후 가위바위보로 어느 쪽에 가서 살지 정했단다. N이 타히티에서 태어난 걸 보면 아마도 어머니의 승리였던 것 같고. 그 후 부모님의 일 때문에 자주 이동해야 했다고 한다. 타히티에서 프랑스 루아르 지방을 거쳐 노르망디 지방까지. 나이차이가 좀 나는 두 누나들은 이미 성인이 되었을 때라서 본인들의 살길을 찾아 나선 후였지만 N은 중학교만 전학을 3번이나 가야 했다고.



레위니옹은 남반구 인도양에 있는 프랑스의 해외 영토다. 마다가스카르 근처에 위치한 제주도보다 약간 큰 화산섬. 아주 작은 섬이라서 지도상으로 봤을 때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눈에 확 들어오지는 않는다.


노예제도가 있었을 때 마다가스카르 등 주변 아프리카 대륙에서 흑인 인구가 유입되었고 현재 레위니옹 인구의 반 정도를 차지하는 이들을 Les Cafres (꺄프르)라고 부른다. 프랑스 본토에서 온 백인 인구들도 정착을 시작했고 이후에 레위니옹에서 태어난 백인들을 Les Yabs (얍)이라고 한다. N의 아버지는 본인을 Cafre라고 하고, 둘째 누나의 남편은 본인을 Yab이라고 소개했다. 레위니옹 사람들은 프랑스 본토 사람들을 지칭할 때는 les Zoreilles (조레이)라고 부른다.


레위니옹에서도 역시 프랑스어를 주로 사용하지만, 프랑스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레위니옹 크레올어를 섞어서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프랑스어로 귀를 les oreilles (레 조레이)라고 하는데 프랑스 본토 사람들이 크레올어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자꾸 다시 말해 달라고 하다 보니 마치 귀가 둔한 사람들 같다고 해서 Zoreilles라고 부른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중에는 Les Malbars (말바)라고 불리는 인도 남쪽 출신 인구와 Les Zarabs (자랍)이라고 불리는 무슬림 인도인, 중국, 베트남 등의 이주 노동자들도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다인종, 다문화 섬이 되었다. 섬 이름인 La Réunion (라 레위니옹) 은 프랑스어로 회의, 모임, 재회 등을 의미한다. 그때는 여러 나라에서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을 고려해서 레위니옹이라고 지은 것은 절대 아니지만 지금 보면 레위니옹이라는 단어만큼 레위니옹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없을 것 같다. 레위니옹 섬이 되기 전의 이름인 부르봉 섬, 보나파르트 섬 등에 비하면 레위니옹이 낫지 않아?



레위니옹으로 가기 위해서는 프랑스 파리에서 11시간 반 정도 비행기를 타고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야 한다. 한국에서 레위니옹을 가려면 방콕이나 말레이시아 등을 거쳐서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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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Corsair라는 저비용항공사를 선택했다. 듣도 보도 못한 레위니옹으로 가면서 듣도 보도 못한 항공사까지. 파리 오를리 공항 4 터미널을 출발해서 레위니옹의 롤랑 가로스 공항으로 간다. 저비용항공사라고는 하지만 지금 같은 연말연시 성수기에는 전혀 저비용이 아니다. 거기다가 수하물 추가 요금까지 내야 한다. 그래도 파리와 레위니옹을 자주 왕복하는 N의 가족들의 말로는 레위니옹을 거쳐가는 다른 항공사들에 비하면 기내식 및 서비스가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 하더라. 실제로 유럽 항공사들 중에서 이렇게 까지 친절한 승무원들은 처음 만나본 것 같기는 하다.


비행기에는 예상대로 가족 단위 여행객이 많았다. 다들 집으로 돌아가는 건지 짐도 가득이었다. 가족들에게 줄 선물인지 공항 면세점에서도 선물을 잔뜩 사더라. 수하물 안에 N의 가족들과 조카들에게 줄 선물을 나도 나름 잔뜩 실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큰 짐들을 보니 왠지 내 선물들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뭘 좀 더 샀어야 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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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로 들어서는데 이미 아기들이 자지러지게 울고 있어서 잠은 다 잤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한숨도 못 잤다. 그래도 그 덕분에 한강 작가님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뚝딱 다 읽었고, 블랙 핑크 노래가 나오던 슈퍼 배드 4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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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간 비행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라이언에어나 이지젯, 에어부산 등의 저가항공 이코노미석을 타고 11시간을 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도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할 수 있는 터치스크린이라도 있는 게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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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니옹에서는 럼이 유명하다. 특히 럼에 과일이나 향신료를 넣어 만든 담금주인 Rhum arrangé가 정말 유명하다. 기내식을 먹을 때도 Planteur (럼과 과일 주스를 섞은 칵테일 비슷한 술)을 달라고 하면 주신다. 칵테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좋아할 텐데, 안타깝게도 나는 달달한 술을 딱히 선호하지 않는 편이라서 그냥 와인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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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간을 뜬 눈으로 지새우고 드디어 레위니옹 생드니 롤랑 가로스 공항에 착륙했다. 착륙하자마자 밖으로 보이는 맑은 날씨와 바다를 보면서 내가 멀리 오긴 왔나 보다 했다. 조금 전까지도 우중충한 파리에 있었는데, 갑자기 지상 낙원으로 와버렸다.


공항에서 짐을 찾고 나가서 나를 데리러 와주신 N의 첫째 누나와 만났다. N은 다음 날 도착 예정이라서 나는 하루를 N 없이 N 가족과 보내야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부모님을 갑자기 만나는 건 서로에게 부담일 거라고 생각해서 이미 자주 만나 익숙한 N의 첫째 누나네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에 부모님을 만나서 N을 데리러 공항으로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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