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의 첫째 누나 가족과 나, 그리고 La Saline-les-Bains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나를 데리러 온 첫째 누나 V와 상봉했다. 하필이면 짐이 제일 늦게 나와서 한참을 기다렸다. 더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더울 줄은 몰랐다. 지나간 기억은 늘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더니 30도가 넘는 여름의 더위는 까맣게 잊고 햇살만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까만 티셔츠에 까만 레깅스를 입었는데, 공항 밖으로 나오자마자 햇빛이 너무 강해서 돋보기로 나를 비추면 타 죽겠다 생각했다.
다행히 꽉 막힌 교통상황 때문에 V는 내가 짐을 찾아서 나올 때쯤에야 공항에 도착했다. V와 만났으니 Bises (비즈) 볼뽀뽀는 해야겠는데 11시간 넘게 비행기 안에 있었던 데다 밖으로 나온 지 몇 초만에 벌써 땀이 슬슬 나기 시작해서 왠지 나에게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짐을 기다리면서 양치라도 하고 온 게 얼마나 다행인지.
V와는 이미 파리에서 몇 번 만났었다 보니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마치 어제 만난 사람처럼 다시 만나서 함께 차에 탔다. 함께 그녀의 집으로 이동하면서 비행기 안에 얼마나 아기들이 많았고, 가족 여행자들이 많아서 시끄러웠는지, 나는 요즘 무엇을 하는지, N과는 어떻게 지내는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창 밖으로 왼쪽은 높은 산들이 오른쪽은 저 멀리 바다밖에 보이지 않았다. 바다 넘어 마다가스카르가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 저 끝까지 바다 밖에 없는데 어떻게 바다 넘어 또 더 큰 섬이 있냐. 말도 안 돼.
첫째 누나 V와 내 연인 N은 열 살 차이가 난다. 나와 내 동생은 일곱 살 차이. V의 남편은 가족 중 늦둥이 막내고, N도 막내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공통점이 많았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첫째라는 타이틀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냥 잘 통했다. 우리 둘 다 어릴 때는 무엇을 하든 모범이 되어야 하고 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다. 이런 점이 동생들에게는 아이러니하게도 언니, 누나는 저렇게 했는데 동생인 너는 왜 그래, 너는 왜 안 해라는 비교로 돌아오게 된다는 건 나중에서야 알았다. 첫째가 하는 일들이 다 정답이라고 정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어쩌다가 내가 하는 일이 보기가 되었고, 내가 길을 잘 닦아 놔야 동생이 오기 편하다고 생각했었는지 모르겠다. 동생은 내가 간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레위니옹에서는 대중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에 자동차로 이동을 많이 한다. 그래서 교통체증이 심한 편이라고. 공항에서부터 V 가족이 살고 있는 La Saline-les-Bains (라 살린-레-방)이라는 동네까지 거의 한 시간 정도가 걸렸다. 도착하자마자 샤워만 간단히 하고 V와 함께 점심을 먹으러 해변으로 향했다.
해변에 있는 식당에서 V의 남편도 뒤늦게 도착해서 만났다. 그와도 초면은 아니고, 파리에서 만난 적 있었다. V의 남편 A는 매일 아침 서핑을 한다. 어릴 때부터 서핑을 즐겼던 A에게는 서핑이 거의 본인의 삶의 전부나 다름없다. A도 내 남자친구의 남매들처럼 역시 타히티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잠깐 일 때문에 프랑스 본토에서 살 때는 서핑하러 가는 게 쉽지 않아서 너무 힘들었지만 지금은 서핑하기에 완벽한 장소인 레위니옹 서쪽 해안가에 살아서 좋다고 했다. 5-6년 전에는 상어가 가끔 나타나서 인명 사고가 나기도 했는데, 최근에는 상어가 나타나지 않은지 좀 되었단다. 아마도 지구온난화와 관련 있지 않겠냐며.
11시간 동안 거의 잠을 못 자서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더라. 그래도 신발을 벗고 맨발로 하얀 모래를 느끼며 점심 완료. 평일이지만 해변에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바로 집 앞에만 나가도 멋있는 해변을 바라보면서 점심을 먹을 수 있다니. V는 참 좋은 곳에서 살고 있구나.
평일이라서 수업을 마친 V의 아이들을 학교에 데리러 갔다. 아이들을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나도 함께. 이 아이들 생일 선물을 프랑스 본토에서 레위니옹까지 보내기엔 너무 돈도 시간도 많이 들어서 생일 편지를 몇 번 보내줬었는데, 그때마다 나를 어서 만나고 싶다며 영상 편지를 보내주곤 했다. 학교에 들어가서 아이들 이름을 부르니까 나에게 달려와서 안겼다. 나를 보자마자 만나게 되어서 너무 기쁘다고, 생일 때 보내줬던 카드가 너무 감동이었다고, 꼭 만나고 싶었다고 하더라.
아이들은 각각 6살과 8살이다. 나도 이 나이 때 이렇게 감정 표현을 많이 했던가 생각해 보면 나와 우리 가족은 이렇게 감정 표현을 잘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우리 가족과는 사랑한다는 말은커녕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족들에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N의 가족들도 그렇고 N도 그렇고 감정 표현을 구체적으로, 많이, 자주, 잘하는 사람들이더라. 작은 것에도 고맙다고 하고, 사랑한다고 하는 가족들. 나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N을 만나면서 점점 변하고 있다. 좋다는 표현도, 싫다는 표현도 잘하지 않고, 사랑 표현은 더더욱 어색했는데 표현을 많이 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니 나도 덩달아 자연스러워지는 것 같고, 이런 변화가 싫지 않다. 예전에는 왜 안 했을까. 왜 부끄럽고 어색했을까?
비행기 안에서 한숨도 못 잤다 보니 당연하게도 10시간을 넘게 잤다. 일어나자마자 아이들이 나에게 물고기를 보러 가자고 했다. 오후에는 햇빛이 너무 뜨거워서 갈 수가 없고 무조건 아침 일찍 가야 한단다.
해변으로 가는 길에는 해변 앞답게 상점도 많고 식당도 많았다. 걸어가면서 아이들이 해변에서 어떤 물고기들을 볼 수 있고, 그 물고기들이 얼마나 특별한지에 대해 신나게 설명해 줬다. 물론 물고기들의 이름이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가끔 거북이도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만 기억이 난다.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으로서 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수영을 못 한다. 아이들에게, 있지 근데 나는 수영을 못해.라고 했을 때 충격을 받은 모습을 잊지 못하겠다. 왜 수영을 못하냐, 파리에서는 학교에서 수영을 안 배우냐, 파리에서는 수영장이 없냐 등 질문 세례를 받았다.
이 날 깨달은 건, 이 아이들은 내가 프랑스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 그냥 발음이 조금 특이하고 자신들의 부모님보다는 쉬운 단어를 사용하는 파리에서 온 이모 정도로만 생각한 거다. 내가 파리를 대표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건가. 찐 파리지앵들에게 미안한걸. 어쩌면 외국인이라는 개념이 아직 자리잡지 못 한 걸지도 모르겠다. 해변에 누워서 한국어로 된 책을 읽으니 나에게 이런 특이한 글자를 언제 어디서 배웠냐고 물어 보더라고. 그래서 프랑스어가 내 모국어가 아니라고, 나는 태어나서부터 이 이상하게 생긴 언어를 썼고 프랑스어를 최근에 배운 거라고, 모든 나라 사람들이 태어나서부터 프랑스어를 쓰는 건 아니라고 했다. 이렇게 나는 아이들에게 다양성을 보여준 거니까 잘 된 건가. 어릴 때부터 나 같은 외국인을 보고 자라니까 얘네는 열리고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크지 않겠어?
레위니옹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지만 모든 바다가 해수욕을 하기 적합한 것은 아니다. 레위니옹 레위니옹 서쪽에 위치한 L'Hermitage (에르미타쥬) 해변부터 La Saline-les-Bains (라 살린 레 방)의 해변은 레위니옹 서쪽에서 가장 해변을 즐기기 좋은 곳 중 하나다. 물의 온도가 차갑지 않아서 일 년 내내 해수욕이 가능하고 레위니옹에서 가장 파란 석호 해변으로도 유명하다. 석호의 깊이가 얕아서 물에 들어가면 바로 산호초들과 내 다리 옆을 지나는 물고기들이 보인다. 그래서 아이들과 스노클링을 하기 완벽한 곳. 해변 뒤로는 Filao(필라오)라고 불리는 카수아리나 나무들이 늘어서 있어서 그늘을 만들어 준다. 소나무 종류인 것 같고, 찾아보니 35m까지도 자란다고 한다.
저 멀리 Saint-Leu 쪽 높은 언덕에서부터 패러글라이딩을 해서 해변에 도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바다가 맑고 푸르고 산호초가 늘어서 있는 해변이라 가까운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절경이겠다.
한참을 놀고 있다가 나와서 모래에 앉아서 몸을 말리고 있었다. 갑자기 전화가 와서 받으니 N의 비행기가 30분이나 빨리 도착할 예정이라서 지금 당장 데리러 공항으로 출발해야 한다는 거다. 그래서 제대로 준비도 못 한 채로 허겁지겁 V네 집으로 달려가서 짐을 챙겼고, 곧이어 도착하신 N의 부모님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