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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쁘띠 Dec 19. 2024

착한 며느리 콤플렉스

죄송합니다. 어려울 것 같아요. 안될 것 같아요.

불편해요. 하지 말아 주세요. 싫어요.


나는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외국에서 보냈지만 여전히 나의 엄마는 뼛속까지 한국인이어서 가정에선 한국 문화를 많이 배우고 자라왔다.

참는 것이 미덕이라며 나에게도 엄마는 무시하거나 참거나 그러는 게 이기는 거고 내가 편해지는 거라고 늘 말해주었다.

가정환경과 여러 가지 외부적인 요인들로 인해 한국에는 참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많이 존재하는 것 같다. 착해야 된다는 어떤 압박 아닌 압박감이 내게도 있었다.

거절하는 방법을 잘 몰랐던 걸까, 거절하고 싶지만 거절하기 어려웠던 더군다나 나는 I의 성향, 내향성이 더 강한 사람이란 말이다.

싫어요 라는 말을 배우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나는 거절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시댁의 어떤 요구에도 거절을 못하고 그저 수용적인 며느리로 지냈던 것 같다.

물론 중간에서 남편이 조금씩 역할을 해주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신혼집에서 2시간 이상으로 출퇴근을 하며 사람을 만들어내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6세 7세 아이들을 상대하는 선생님이다. 그것도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전혀 다른 한 사람을 만들어내는 직업이다. 세상 모든 직업이 귀하고 고되지만 , 내 직업도 그랬다. 일을 하고 오면 모든 에너지가 고갈된다. 아이들도 상대하고 어머님들도 상대를 하는 직업이니 정말 기운이 쫙쫙 빠진다. 유일하게 늦잠을 자는 날은 토요일과 휴일, 정말 오롯이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날이다.


어느 날,  남편은 출근을 했고 나는 늦잠을 자고 있었다. 곤히 자고 있는 내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시어머님이었다.


“잤니? 이모가 왔는데 이모가 너 보고 싶대 , 올 수 있니? 이모 큰 딸이 너 못 봐서 너무 궁금하대”

올 수 있냐고 나한테 질문을 하는 건가? 그냥 오라고 하는 거 아닌가 반감이 들었지만 나는 착한 며느리가 되고 싶었고 좋은 며느리가 되고 싶었으니 “네 갈게요” 하고 후다닥 준비를 하고 시댁으로 향했다. 남편 없는 시댁은 호랑이 굴 아닌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시댁에 도착하고 시이모와 큰 딸과 인사를 나눴다. 시이모의 큰 딸이 “언니 예쁘게 생겼다” 며 시어머니께 칭찬을 던지자 , 시어머님이 기분이 좋으셨는지 고맙다며 화답하셨다.

(어머님은 돌아가신 (시) 할아버님께 내가 시누이보다 안 예쁘다고 말하셨던 분이다. 그걸 나는 할아버님을 통해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것도 결혼 전에, 뭐 당연히 엄마는 자기 새끼가 가장 예쁘니까. 하지만 그렇게 뒤에서 얘기를 들은 나는 어땠을지 생각은 해보셨을까? 근데요 저는 자연미인이지만, 언니는 고치셨잖아요. 고쳤는데도 예쁘다는 느낌이 없는걸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절대 그러지 못하는 아이였다. 우리 엄마와 지인들이 말했다. 너는 지적이게 예쁘고 거기는 싼타나게 예쁘장해. 역시 모든 엄마들은 다 똑같다. 자기 새끼가 우주 최강이다)


평소 남편과 시댁에 가면 내가 먼저 뭘 하려고 해도 그냥 앉아있으라고 하시면서 , 그날은 남편이 없어서 그랬나 아님 시이모님 앞에서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고 싶으셨나, 나에게 작은 일들을 시키셨다. 뭐 그 정도야 나도 충분히 며느리로서 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고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친정에서도 자연스레 할 수 있고 하는 일들이니까.

하지만 난 그저 시간이 빠르게 흘러 남편이 퇴근하길 바라고 있었다. 다 같이 모여 앉아서 다과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 시누이가 외출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또 이상하다 인사를 안 한다. 내가 더 어리니, 먼저 했어야 하는 건가? 보통은 자신의 집에 온 손님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나? 이 집은 인사를 안 하는 게 내력인가 3초 정도 생각이 들었지만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다. 시누이는 앉자마자 자신의 이야기를 폭포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는 별로 듣고 싶지 않았고 그냥 먼저 가야 한다고 하고 나가고 싶었는데 용기가 나질 않았다. 사실 그렇게 해도 뭐라고 할 것 같진 않았는데 나는 왜 못 그랬을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참 바보 같았다. 그들의 탓이 아니라 나의 문제였구나 싶다.


그 후로도 나는 몇 번의 연락에 거절을 못하고 나간 적이 꽤 있었다. 한 번은 내 생일이라고 백화점을 셋이서만 가자고 하셨다. 시어머님 시누이 그리고 나.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 일단 불편했고 , 나와 스타일이 맞지 않는 두 사람이었다. 두 분이 돈을 반반 모아서 나에게 원피스를 하나 선물해 주셨다. 사실 내 스타일이 아니었으나 그냥 감사히 받았다. 어쨌든 그것도 하나의 마음이고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 말이다. 나는 두 분께 커피를 사드렸고 , 그렇게 짧고 굵게 생일 선물 쇼핑을 마치고 왔다. 또 한 번은 시어머니와 시누이 둘이서만 해외여행을 간다는 연락을 받았고, 일주일 정도 시아버님이 혼자 계시니 식사를 좀 챙겨줬으면 한다고 남편에게 말을 남기고 가셨다. 남편 혼자서도 충분히 왔다 갔다 하며 끼니를 챙겨드릴 수 있지만 괜히 눈치가 보이고 며느리가 또 해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어서 남편이 아닌 내가 매일 시가에 방문해 식사를 챙겨드렸다. 그 당시 나는 이런 사소한 일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마음 그릇은 가지고 있었다. 그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었고 또 마냥 억지로 한 건 아니었다. 혼자 계시는 시아버님이 안쓰럽기도 했고 나는 아빠가 안 계시니 챙겨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문득, 우리 엄마를 모시고 여행을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내가 , 엄마 끼니를 이렇게 정성으로 며칠 챙겨준 적도 없는 내가 , 시댁에선 참 잘도 하고 있었다.

불효녀였다. 막상 나의 엄마한테는 착한 딸이 되어주지 못했는데 남의 집에 와서 착한 며느리가 되려고 하다니.. 마음이 이상하고 불편했다. 정확히 어떤 감정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건 나는 내 가족보다 다른 가족을 더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착한 딸도, 착한 며느리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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