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보다 더 무서운 게 시누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무서운 게 아니라 유별나고 유난스러운 거 아닐까. 그걸 무섭다고 표현하는 거겠지?
시누이의 이야기로 나는 기본 3화 이상은 쓸 수 있을 것 같다. 자잘한 이야기들이지만 그것들이 쌓이면 거대해진다는 걸 우리는 안다.
결혼하고 며칠 안 지나 시어머님은 축의금 정산을 하자며 남편을 따로 불렀다. 남편은 시누이와 본가에서 축의금 정산을 하고 돌아왔고, 그 부분은 그들의 일이니 나는 가지도 않았고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한국은 결혼을 하면 양가 부모님을 한 번씩 집에 초대해 집들이를 한다는 걸 알고 신혼여행을 마치고 천천히 초대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결혼식을 올리고 나면 긴장이 풀리니 다들 한 번씩 몸살을 겪는다는 이야기도 전부터 들어왔었고 나에게도 그 몸살이 크게 찾아왔다. 입에는 헤르페스, 온몸에는 고열과 식은땀 거의 일주일을 넘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앓아누워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씩씩거리며 집들이하지 말자는 얘기를 꺼냈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었고 , 남편은 내게 핸드폰 (카톡) 내용을 보여주었다 직접 읽어보라고. 시누이와의 대화였다.
시누이는 남편에게 ‘집 주소 보내봐’라는 카톡을 남겼고 남편은 “왜?”라고 질문했다. 이 대화에서 이상한 부분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나는 없었기 때문이다.
집 주소를 보내라 해서 왜냐고 물은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시누이는 급발진을 하기 시작했다. 결혼 선물 보내려고 집 주소를 물었던 것이다. 그런데 남편이 왜냐고 질문하니 그게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결혼 선물 보내려는데 ㅡㅡ 우리가 뭐 쳐들어가냐?” 이런 식으로 받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둘의 싸움이 시작됐다. 시누이는 장문의 카톡을 남편에게 보냈다. 나는 하나하나 빠짐없이 읽고 또 읽었다. 그 내용엔 이런 말들이 있었다.
“결혼하고 신혼집 초대하는 게 당연한 거지 너네가 부모가 없어?”라는 말과 “결혼 선물 안 보낼라니까 앞으로 집 모든 행사 다 따로 하고 따로 챙겨”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손절을 한 것이다. 남편은 엄마도 아니면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기분이 나빴고 앞으로 다 따로 하겠다고 답하고 서로는 서로를 차단해 버렸다.
남매가 얼마든지 싸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팔은 안으로 굽으니, 나의 입장에선 어처구니가 없었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친 것 같은 모습으로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네’라는 단어가 신경이 쓰였지만 나는 부부가 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럼에도 몹시 불편함이 몰려왔고 나는 고민 끝에 먼저 시누이에게 연락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말이다) 나는 말 수가 없고 말이 많은 편이 아니라 글로 마음을 전하는 게 훨씬 편한 사람이다. 그래서 카톡으로 시누이에게 핵심만 전했다. 남편을 통해 얘기를 전해 들었고, 결혼식 이후 몸이 많이 아파 빨리 초대를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사실은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다 낫고 초대하려고 했다는 식의 의사 전달을 했고 시누이는 내게 답을 아주 친절히 보냈다. 괜히 민망해진다며, 다들 식 끝나고 아프다던데 괜찮냐며 나를 걱정하는 듯한 답을 보냈다. 그리고 그렇게 끝이 났다. 어딘가 모르게 찝찝하긴 했지만 시누이는 그래도 진정되어 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먼저 연락함으로 진정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축의금도 어떤 선물도 하지 않았다. 나는 기대도 안 했고 정말로 상관이 없었다. 그 정도로 내 인생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엔 무시하는 게 제법 쉬웠다.
시부모님을 초대하던 날 역시나 시누이는 오지 않았다. 남편과 연을 거의 끊듯이 했으니 본인도 오기 민망했을 거고 싫었을 거다. 그리고 그 둘은 사실 현재까지도 서로를 차단하고 있는 상태이다.
결혼하고 2년 차 되던 해에 시어머님은 환갑을 맞이하셨다. 환갑은 특별한 생일이니까 조금 거대하게 준비를 했다. 룸 있는 식당을 예약하고 그곳에 풍선과 플랜카드 금으로 된 명패까지 다양하게 준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선 최선을 다했다. 어쩔 수 없이 다 같이 모여야 하는 식사 자리였고 시누이도 그날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케이크를 준비해 왔고 나머지는 다 우리가 했다. 분명 각자 따로 하자고 했는데.. 언행불일치. 내가 가장 싫어하는 행동이었다. 밥상 다 차려놓으니 숟가락만 딱 얹는 사람 그런 사람.
식사를 다 마치고 케이크에 초를 켜는데 불을 붙이려고 하던 순간, “나 불 못해 네가 해” 라며 남편에게 불을 넘기는 시누이의 모습을 보고 나는 놀랐다. 그 나이 먹도록 초도 못 켜?
시누이는 손을 쓰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손을 쓰는 직업이어도 내 주변, 같은 직업을 가진 지인들은 50도가 넘는 피자 알바집에서도 국밥 집에서도 열심히 알바도 하며 그렇게 살아가는데 그거 하나를 못 한다고? 나는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오냐오냐’ 자랐구나 싶은 생각이 확 들었다. 그런데 또 금세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각자 가정환경이 다르고 시부모님의 육아 방식을 존중하고 싶었고, 그냥 그런 사람이구나 생각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누군가에겐 전혀 이상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남편을 통해 들은 시누이란 사람은 이러했다.
질투가 많고, 자존감이 없고 자존심은 강하고 엄마 아빠의 사랑을 잘 받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결핍이 있고 여전히 철이 없는, 독불장군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아직 오래 보지 않았고 다 겪어보지 않았기에 반 정도만 믿었다. 왜냐면 나는 무조건 겪어봐야 안다는 주의다. 그래서 아무리 남편의 말이라 해도 또 다른 이야기가 있을 수 있으니 일단은 그러려니 여겼다. 사실 시누이와의 교류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따로 만나서 식사를 한 적은 시누이 생일 한 번이었다. 무슨 이야기들이 오고 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랑은 결이 다른, 맞지 않는 사람인 것은 확실했다. 시어머님은 내일모레 마흔 인 딸에게 여전히 공주라고 부르신다. 공주라는 애칭은 엄마가 딸에게 할머니가 되어서도 부를 수 있는 애칭이다. 엄마 눈엔 언제나 우리 모두는 아기의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애칭만 공주여야 하지 않은가? 모든 일상이 공주처럼 여겨지는 듯했다. 물론 내가 그들과 사는 것이 아니기에 100프로 확신하지 못하지만, 함께 마주하는 시간만큼은 그래 보였다. 시어머님도 아침 일찍 출근을 하시는데, 딸내미 도시락까지 싸놓고 가시고 딸은 언제나 오후에 출근을 하는 사람이다. 그 정도 나이는 스스로 챙길 수 있지 않은가 싶었지만 그것 또한 그럴 수도 있구나, 신기하다고 당시엔 생각했다. 8시 넘어 퇴근하는 딸의 밥상을 매일 같이 따로 차려주시고, 분명 시어머님도 힘드실 텐데 말이다. 월급을 받으면 적어도 엄마에게 매달은 아니어도 이따금씩 용돈도 드릴 수 있는 거고, 모든 집안일을 다 해주시니 감사의 마음을 담아 생활비를 보태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런데 그녀는 오로지 자신을 꾸미고 치장하는 데에 정말 많이 애쓰는 사람이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시어머님이 괜찮으시다 하면 나는 사실할 말이 없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