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음식, 흰 죽 2
돌봄의 음식, 흰 죽 2
아들, 너도 이제 직장에 다니니까 부양이라는 말을 알 거야. 부양가족 들어봤지? 엄마는 부양(扶養)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저절로 어깨가 아파와. 사실 부양의 부(扶)는 등에 짊어지다 라는 뜻의 부(負)와는 다르거든. 부(負)는 남부여대(男負女戴), 보부상(補負商) 등의 단어에 쓰이고, 부(扶)는 돌본다는 뜻인데 부조(扶助) 같은 단어에 사용해. 그러니까 부양은 돌보아 키운다는 뜻이지 등에 짊어지고 키운다는 뜻은 아니야. 그런데 나는 부양이 扶養이 아니라 負養인 것만 같이 느껴져.
외할아버지는 젊어서부터 자주 어깨를 앓았어. 퇴근 후에도 쉬지 못하고 아픈 어깨로 늘 일을 하셨지. 부양가족이 다섯이나 됐으니까. 남녀노소 다섯 식구가 아버지의 그 좁은 어깨와 등에 다닥다닥 매달려 살았던 거야. 우리 집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다른 집도 비슷비슷했어. 당시에는 맞벌이가 드물었고, 국가는 복지를 모르던 시절이었으니까.
식구를 부양해야 했던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안타까워하지만, 사실 우리 세대까지만 해도 아버지들은 그리 살가운 분들이 아니었어. 식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무엇을 고민하는지 어디가 아픈 지 등을 살피기에 아버지는 늘 바쁘셨고, 그런 일은 아버지가 챙기기엔 너무 자잘한 일들이었거든. 옛날엔 그랬어. 가장은 그런 사소한 돌봄을 행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지. 그리고 돌봄 노동을 면제받은 가족 구성원은 자연스레 가족들에게서 소외됐어. 밥 벌어 먹이는 사람으로서의 권위만 있을 뿐 밥해 먹이는 사람의 애틋함은 없었던 거야.
부양이라는 단어가 어깨, 등이 뻐근해 오는 고된 노동과 소외로 기억되는 데 비해, 돌봄이 가슴이 따뜻하게만 기억되는 건 또 아니야. 돌봄은 늘 부당하고 과중한 노동이었고 자기 발전이나 성과로 남는 것 없는 소모적인 노동이었지. 육아와 간병으로 이어지는 길고 긴 독박 돌봄 속에 전업 주부는 시들어 갔고, 취업 주부는 압사당했어. 결국 부양(扶養)이나 돌봄이나 모두 부담(負擔)이 되기는 마찬가지인 거지.
언어라는 것이 생물과 같아서 당대에 그 변화를 실감할 수도 있어. 어떤 단어가 언젠가부터 내가 알던 그 뜻과 다르게 쓰이고 있는 경우처럼 말이야. ‘돌봄’이라는 단어가 그랬어. ‘돌봄’은 ‘돌보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돌봄 교실, 돌봄 노동, 돌봄 시스템 등 명사로 쓰이는 경우가 많아졌더라고. 의미도 살짝 달라졌어. ‘돌보다’는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다([국립국어원] 누리집 [표준국어대사전])라는 뜻인데 비해 ‘돌봄’은 건강 여부를 막론하고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거나 증진하고 건강의 회복을 돕는 행위([국립국어원] 누리집 [우리말샘 -전문가 감수정보])로 쓰이고 있더라고. 돌봄은 가족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던 양육과 노인수발, 간병 등을 끌어내 사회화한 단어인 것 같아. 돌봄의 부담을 국가가 책임져 줘야만 비로소 우리는 관계의 질곡에서 벗어나 관계의 아름다움을 가꿔갈 수 있을 거야.
아들, 엄마는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고, 또 잘~ 봤으면 좋겠어. 돌보는 것은 흘깃 한 번 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돌아가면서 보는 것이고, 주의 깊게 보는 것 즉 살피는 것이거든. 가족이든 가족이 아니든, 한 집에 모여 살든 따로 살든,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고, 또 보고, 돌아보고, 살펴보면 그 사람이 다친 데는 없는지, 안색은 다른 날과 어떻게 다른 지, 표정은 어떤 지 알 수 있잖아. 그럼 밥은 잘 먹었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걱정거리는 없는지, 맘 상한 건 아닌지 묻고 위로하고 적절한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이게 바로 돌보는 것이고, 돌보는 것의 시작은 말 그대로 세심히 보는 것이야.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며 관계의 돈독한 끈이지만, 또 한편으로 돌보는 것은 습관이고 훈련이기도 해. 저절로 잘 되지는 않는다는 거야. 흔히 남자들이 눈치가 없다고 하는데 그건 잘 보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많아. 뻔히 보이는 것조차 알려주지 않으면 보지 못하는 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지. 그러니까 아들, 보고, 또 잘~ 보려고 지금부터 노력하는 거야. 네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을 끓여 달라고 부탁하기 전에 그에게 딱 맞는 죽 한 그릇을 마련할 수 있는 것도 모두 보는 데서 시작하거든.
네 친구는 좀 어떠니? 많이 나았지? 이럴 때 더 조심해야 해. 조금 나았다 싶어서 음식을 함부로 먹으면 다시 나빠질 수 있거든. 그래도 식욕이 돌아왔을 테니 오늘은 영양가도 있고 소화도 잘 되는 계란죽을 쑤어 주자.
이번엔 쌀을 볶아서 죽을 쑬 거야. 불린 쌀을 체에 밭쳐서 준비하고 바닥에 두꺼운 냄비에 참기름을 넉넉히 두른 다음 쌀을 넣고 중불에서 볶는 거야. 몸에 좋다고 들기름을 쓰는 사람들도 있는데 엄만 참기름이 훨씬 좋더라. 쌀과 참기름 조합은 우리 민족의 영혼에 각인되어 있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향미를 뿜어내는 것 같아.
얼마나 볶아야 될까? 기름에 쌀에 충분히 스며들어 쌀알에 참기름 색깔이 입혀지고 약간 꾸덕해질 때까지. 그다음에 물을 붓고 죽을 쑤는 건 똑같아. 아! 아까 쌀을 체에 밭칠 때 그 물 버리진 않았겠지? 당연히 물은 쌀뜨물부터 사용하고 부족한 건 맹물을 쓰는 거야.
혹시, 만약에, 어쩌다 보니 너희 집 냉장고에 전복 한 마리쯤은 늘 구비되어 있다거나 지금이 굴 먹을 철이라 사다 놓은 싱싱한 굴이 조금 있다면 깨끗이 손질해서 쌀과 함께 볶아줘. 굴은 그냥 잘 씻어서 통째로 볶고, 전복은 유튜브 보면서 거기서 가르쳐 주는 대로 잘 손질한 다음에 살을 잘게 썰어서 볶아줘야 해. 그다음 물 붓고 끓이는 건 다 똑같아.
죽의 농도는 어제 보다 조금 되게 해서 딱 맛있는 죽의 농도를 맞춰 보자. 수저로 떠서 흘려봤을 때 주르르 흐르지 않고 약간 꿀렁거리면서 흘러내리는 정도로. 이 정도가 됐으면 이제 불을 끄고 계란 노른자를 올려 줘. 그릇에 죽을 먼저 퍼 담고 노른자를 올리면 예쁘긴 한데, 계란이 좀 더 푹 익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아무래도 환자이니 충분히 익혀 먹는 게 안전할 수 있어. 그래서 이번엔 냄비에서 계란 노른자를 터트려 고루 섞고 뚜껑을 덮어 잔열로 조금 익히는 방법을 선택했어.
그릇에 담아 먹기 직전에 소금 간을 하고 참기름 한 방울을 떨어뜨려 줘. 어제처럼 간장으로 간을 해도 되는데 계란죽엔 간장보다는 소금이 잘 어울리더라고.
굴죽이나 전복죽도 소금간과 참기름만 더해 먹으면 되는데, 전복죽은 마지막에 전복 내장을 터트려 넣고 섞어줘야 해. 계란 노른자 푸는 것과 똑같이 하면 돼.
이제 이 죽을 먹고 나면 내일부터는 밥을 먹을 수 있을 거야.
아들, 만약 엄마가 너에게 딱 한 가지 축복을 내릴 수 있다면, 엄마는 이런 축복을 내리고 싶어.
네가 살아가야 할 모든 나날에
네가
보고, 또 보고, 돌아보고, 살펴볼
너를
보고, 또 보고, 돌아보고, 살펴보아 줄
사람들이
너의 곁에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