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배워 뒀으면 하는 두 번째 음식은 흰 죽이야. 흰 죽은 쌀을 주식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삶의 시작이자 끝이야. 엄마 젖과 함께 세상의 첫 음식으로 입에 넣는 것이 흰쌀 죽이고, 삶을 마감하기 전에 마지막까지 먹을 수 있는 음식도 흰쌀 죽이잖아.
죽의 종류는 참 다양해. 사실 종류를 헤아린다는 것이 특별히 의미가 없을 정도로 모든 식재료로 다 만들 수 있는 것이 죽이지. 죽은 곡식에 부재료를 넣고 물을 부어 끓이는 가장 원초적인 조리법의 한 가지야. 통곡물 그대로 끓이기도 하고 갈아서 끓이기도 해.
지금은 쌀로 밥을 지어먹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쌀이라는 곡물을 형태 그대로 익혀낼 만한 조리 도구가 발달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을 거야. 밥을 짓기 위해서는 높은 온도를 견딜 수 있고 긴 시간 열을 가둬 둘 수 있는 무쇠솥 같은 그릇이 필요했거든. 그전까지 곡물은 죽을 끓여 먹거나 시루에 쪄서 떡과 죽의 중간쯤으로 먹었을 거래.
밥을 짓고 떡을 찌고 지지고 튀기는 등 곡물로 별의별 음식을 다 해 먹을 수 있게 된 뒤에도 죽은 가난한 사람들이 배를 불릴 수 있는 조리법으로 이어져 왔어. 죽은 식재료의 양을 불려 줘서 포만감을 주거든. 기근이 들었을 때는 곡물은 아주 조금 들어가거나 아예 들어가지 않고, 평소에는 식재료로 쓰지 않던 초근목피 등 먹을 수 있는 건 무엇이든 넣고 끓여 먹었지. 이런 기아의 음식도 죽이었어.
많고 많은 죽 중에서 흰쌀만으로 쑨 죽은 아주 고급 음식이야. 거기다 참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계란 노른자까지 하나 얹는다면 더 말해 뭐 하겠어. 우리 어렸을 때는 이 죽을 얻어먹기 위해 나도 좀 아파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 한 두 번쯤은 다 해봤을 거야.
꾀병이 아니라 정말 아플 때 누군가가 쑤어 다 준 뜨끈한 죽 한 사발의 기억은 참 푸근하면서도 한없이 서럽지. 아파서 서러운 것이 아니라 삶이 원래 서러운 것인데 고슬고슬한 밥을 퍼먹을 때는 잊고 지내던 설움이 아파서 연약해지면 느껴지는 것 같아. 마치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이 누군가의 위로 한 마디에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흰 죽처럼 뽀얗고 연약하지만 향기로운 삶의 속살이 드러나는 순간이지.
엄마는 자라면서 여자로 태어난 것이 너무 억울하고 서러웠던 적이 많았어. 물론 성인이 된 다음에도 여성이기 때문에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거나 불리한 입장에 처했다고 느낀 적도 많고. 그리고 반대로 남성이 아니라는 점에서 안도감을 느낀 적도 여러 번 있었어. 가장 자주 안도한 것은 남자가 아니니까 울어도 된다는 거야. 사내 녀석이 왜 우냐, 사내대장부는 울면 안 된다는 말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이들 때부터 듣는 말이잖아. 왜 사람들은 남성의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을 그렇게 집요하고도 잔혹하게 틀어막으려 들까? 요즘은 좀 덜 해지기는 했지만 남성을 향한 이런 보이지 않는 폭력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아.
아들,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엄마를 속일 수는 없어. 엄마는 네가 얼마나 여리고 섬세한 사내인지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네가 가끔 울었으면 좋겠어. 울고 싶을 때, 울만 할 때, 또는 네 안의 심연이 너를 끌어당길 때. 울어도 좋고, 울었으면 좋겠고, 울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야 네 안에 가득 찬 물이 밖으로 빠져나와 심연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을 만큼 몸 안의 압력을 줄일 수 있어. 그러면 내 안의 물은 찰랑찰랑 예쁜 소리를 내며 맑게 빛날 수 있을 거고, 그렇게 맑게 찰랑거리는 물 같은 영혼을 가져야 삶의 속살이 비록 연약하지만 뽀얗고 향기롭다는 것도 느낄 수 있겠지.
오늘 뽀얗게 연약하고 향기로운 삶의 속살을 붙들고 울어도 좋을 너의 누군가를 위해 흰 죽을 쒀 보자. 흰 죽은 다른 음식을 먹고 소화시키기 어려울 때 먹는 죽이야. 그러니까 먹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미음에 가까운 아주 묽은 죽부터 진 밥에 가까운 된 죽까지 농도가 다양하지. 흰 쌀죽은 가장 단순한 음식 같으면서도 무한 변형이 가능하고, 그만큼 먹는 사람에게 딱 맞춤하게 만들기가 까다로운 음식인 거야.
어렸을 때 ‘대장금’이라는 드라마 본 기억 나? 워낙 국민드라마였으니까 제대로 보지는 않았어도 몇 번 어깨너머로 본 기억은 있을 거야. 거기 보면 어린 장금이를 훈련시키기 위해 상궁이 물을 떠 오라고 시키는 대목이 있어. 그러면서 물도 그릇에 담기면 음식이고, 음식은 먹을 사람에게 맞아야 하니까 먼저 상대를 파악하기 위해 질문을 해야 한다고 가르쳐. 모든 음식에 적용하는 건 어려울지 몰라도 적어도 누군가에게 죽을 쒀 먹여야 하는 경우에는 이 말이 꼭 맞는 말이야.
환자든 어린 아이든 죽을 먹어야 하는 사람이 지금 기력이 어느 정도인지, 소화는 얼마나 시킬 수 있는지, 씹는 것은 얼마나 가능한 지 등을 먼저 파악해서 상태에 맞게 죽의 농도는 물론 양념이나 조리법도 조금씩 달리해야 하거든. 그렇다고 엄청 복잡한 요리는 아니고, 그저 조금 더 신경을 쓰면 되는 거야.
자, 상상을 해보자. 너와 같이 살고 있는 누군가가 병이 났어. 열나고 배 아프고 토하고 설사도 해서 병원에 갔더니 장염이래. 오늘 하루는 굶고 내일부터 흰 죽을 드시라고 의사가 사흘 치 약을 처방해 주며 말했어. 겨우 두 끼 굶고 네 친구 얼굴은 반쪽이 됐어. 이제 네가 죽을 쑤어 줘야 할 시간이야.
쌀을 씻어서 불리는 것부터 시작하자. 2시간쯤 불렸다 하면 좋은데 혹시 급하면 씻어서 바로 쑬 수도 있어. 쌀의 양은 반 컵(쌀 계량하는 컵으로) 정도가 적당하고, 이 정도 쌀로 죽을 쑤면 두 대접 정도가 나올 거야. 혹시 집에 찹쌀이 있으면 맵쌀 대신 찹쌀을 써도 좋아. 찹쌀이 소화하기 더 편하니까.
네 친구는 지금 소화력이 아주 많이 떨어져 있으니까 참기름은 사용하지 않고 기름기 없는 죽을 끓이자.
이 죽은 오로지 쌀과 물만 있으면 되는 음식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흰 죽을 어려워하는 것은 죽이 끓는 내내 옆에 지키고 있어야 하는 지루함이 첫째고, 도대체 얼마나 끓여야 죽이 완성된 건지 가늠을 못 한다는 것이 두 번째일 거야. 죽을 많이 안 먹어 봤으니까 끓인 밥과 죽, 미음을 구별하지 못하는 거야.
자, 겁 낼 것 없이 일단 시작해 보자고. 밥을 할 때는 쌀 양의 약 두 배의 물을 부어. 죽을 끓일 때는? 약 여섯 배 정도라고 보면 돼. 큰 그릇에 한꺼번에 물을 모두 붓고 끓일 수도 있지만 냄비가 얇거나 쌀을 충분히 불리지 못했을 때는 물을 여러 차례 나눠 부어줘야 쌀알이 쉽게 퍼져. 처음에는 쌀이 잠길 정도만 물을 붓고 끓이기 시작하는 게 좋아.
여기서 팁 하나! 죽을 쒀서 남기지 않고 바로 다 먹을 거라면 처음부터 소금을 조금 넣고 끓이는 게 좋아. 그러면 밥알도 더 쉽게 퍼지고 간도 잘 베. 그런데 일부 먹고 남겨 뒀다 다시 먹을 계획이라면 간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보통 환자들은 조금씩 자주 먹는 게 좋으니까 죽을 쒀서 한 번에 다 먹기보다는 남겨 뒀다 다시 데워 먹는 경우가 많지. 그래서 간은 먹을 때 하는 게 좋아. 간을 한 죽은 금세 삭아 버리거든.
바닥이 두꺼운 냄비나 솥을 사용한다면 처음에 온도를 올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센 불에서 시작해야 하고 얇은 냄비를 사용한다면 처음부터 중불에서 끓이는 것이 안전해. 밥물이 끓어오르면 뚜껑을 열고 불은 중약 불로 줄여 둔 상태에서 눌지 않게 잘 저어주면서 끓여야 해. 밥물이 증발해서 자작해질 때쯤에 다시 물을 부어 주고, 같은 방법으로 끓이기를 반복하는 거야.
세 번째 부은 물이 모두 증발했을 때 주걱에 밥알을 올려놓고 확인해 봐. 밥알보다 크고 윤곽선이 무너져 있어야 죽이라고 할 수 있어. 보통 건강한 사람이 맛있게 먹는 죽은 이 정도가 적당하지만 네가 돌봐야 할 환자는 지금 심한 장염을 앓고 있으니까 이 보다 조금 더 퍼지도록 끓여주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럼 물을 조금 더 넣고 한 번 떠 끓여 보자. 쌀을 갈아서 끓이거나 주걱으로 밥알을 살짝 으깨 주는 방법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끓여 주면 밥알의 형태는 무너지고 밥물은 걸쭉해져. 밥물이 너무 졸아들고 걸쭉해지면 환자가 넘기가 어려우니까 숟가락으로 떠서 흘렸을 때 주르르 흐를 정도로 묽게 쒀 주는 게 좋을 거야.
다 됐다 싶으면 이제 뚜껑을 덮고 불을 끄고 잠깐 뜸을 들이자. 밥 뜸 들이듯이 오래 둘 필요는 없고 5분 정도만.
죽은 사발(밥그릇)이나 대접(국그릇)에 담고, 죽 상을 차릴 때는 동치미나 나박김치 같은 슴슴한 물김치를 같이 놔주는 게 좋아. 배추김치나 다른 밑반찬은 안 놓아주는 게 좋고. 간은 종지에 간장을 담아내서 그 자리에서 맞춰 먹게 해. 간장은 진간장(국간장 아니고, 진간장 또는 양조간장 등)에 참기름 두어 방울, 갈아 놓은 참깨 약간 뿌려서 내면 돼.
집에 새우젓이 있으면 새우젓 간을 하는 것도 좋아. 새우젓이 소화를 도와주잖아. 새우젓을 국물과 함께 곱게 다져서 참기름, 깨소금 더해 뜨거운 죽에 넣고 섞으면 돼.
이제 죽을 완성 했으니 네 친구, 혹은 식구가 맛있게 먹고 빨리 낫기를 기대할 게. 너도 기억하지? 네 살쯤 장염으로 하루 굶고 나서 엄마가 끓여 준 흰 죽을 냄비 째 들고 퍼먹던 것. 그때 찍은 사진 속의 네 표정은 정말 행복해 보여. 네가 쑨 죽을 먹고 네가 사랑하는 누군가도 그런 표정을 지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