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십이월 Jun 02. 2022

말이 될 수 없어 시가 되었습니다.

詩는 내게 무엇인가?

말이 될 수 없어 시가 되었습니다.

詩는 내게 무엇인가?




겨울의 끝자락, 혹은 이른 봄, 혹은 겨울과 봄의 경계에 있던 그날 아침 내가 읽고 있던 시집은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이었다.  그 얼마 전에 허수경 시인의  유고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을 읽고 생각난 김에 집에 꽂혀 있던 허수경 시집들을 찾아 읽고 있던 중이었다. 


한 시인의 모든 시집을 차례대로 모아 놓고 읽는 것은 시를 읽는 좋은 방법 중 하나다. 많이는 못 하고 몇몇 시인들의 시는 이렇게 읽고 있다. 

시집은 시인의 실패를 전시해 놓은 보고서 같다. 이 사람은 이런 고민을 했고 이런 걸 느꼈고 이렇게 괴로워했고 이런 것을 꿈꿨구나. 그래서 이렇게 실패했구나. 실패해서, 쓰러져서, 무너져 내려 이렇게 변화하고 있구나. 깊어지기도 하고 넓어지기도 하고 느슨해지기도 하고 둥글어지기도 하는구나.   

시집과 시집을 이어 읽으며 이런 것들을 짚어내면 시 한 편 한 편에서 찾는 감동과는 또 다른 서사적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시인의 말’을 허수경 시인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 새로 시작되는 세기 속에 한사코 떠오르는 얼음벽, 그 앞에 서서 옛적처럼 목이 쉬어 가면서도 임을 부르는 곡을 해야겠다 싶었기에, 시경의 시간 속에서 울었던 옛 가수들을 위하여 잘 익어 서러운 술을 올리고 싶었기에”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허수경 / 문학동네 / p.5 ‘ 시인의 말’ 중에서)


여기서 시인은 哭과 曲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고 있다. 그냥 울음이 아니라 곡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니, 곡을 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딱 한 번 아버지의 장례 중에  임계점을 넘긴 감정의 덩어리를 울컥울컥 게워내며 오열조차 기진했을 때 잠깐이지만 곡을 해봤다.  

곡은 음악과 음악 아닌 것의 경계, 언어와 언어 아닌 것의 경계에 있다. 시 역시 그러하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언어가 닿지 못하는 후미진 마음의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은 곡(哭), 시를 쓴다는 것은 그 곡소리를 언어로 옮기는 작업이기에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제 나는 한 시인의 아름다운 실패를 더 이상 보지 못 한다. 허수경 시인은 너무 느슨해지고 둥글어진 말년의 태작(駄作)을 걱정할 새도 없이 서둘러 가버렸다. 시인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다시 한번 읽으며 그의 모든 실패를 애도하고 싶었다. 



나에게도 시는 언어로 갈라내고 정렬시킬 수 없는 스쳐간 순간의 진실, 꿈틀거리는 감정의 원형, 눈 마주칠 수 없는 산발한 삶의 민낯이었다. 그것들은 말이 될 수 없어서 시가 되었고, 그래서 내 시 또한 온전한 통어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 아름다운 실패도 못 되지만 그래도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내 시를 애도해줄 이가 있으면 좋겠다. 그래 주기를 바라며 이렇게 나의 실패들을 진설(陳設)한다.  





 



닮았다



간밤엔 너와 나의 닮음이 

서늘해

돌아누워 이불을 끌어 덮었다.


닮았다.

나와 네가 닮고 너와 그가 닮고

이것과 저것이 닮고 저것과 그것이 닮은

현기증 나는 닮음과 닮음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기와 저기가 닮고 저기와 거기가 닮고

오늘과 어제가 닮고 어제와 그날이 닮아

절벽 같은 기시감은 불쑥 길을 끊는다.


회의도 환멸조차도 닮았다.

몸을 숨길 낯선 절망, 낯선 패배의 땅은 

없으니 


닮아서 어여쁘고 닮아서 애달프고 

닮아서 닮아서

말이 막히는 닮음의 아득함으로


웃는다.


너의 웃음이 내 웃음과 닮았고

그 웃음이 저 웃음들을 불러와 

웃음소리는 끝없이 메아리치고


익숙하게 어깨를 걸어오는 피로

피곤한 어깨를 늘어뜨린 채 

저기 

간밤 꿈자리를 닮은 하루가 걸어간다.







도둑고양이



늦도록 밥을 벌고 오는 둔한 걸음 곁으로

스치듯 앞서가는 기척 하나

도둑고양이

오만한 가벼움으로 담을 넘는다. 


야만을 경계하고 문명을 시기하는 

암상스런 눈으로 인간을 비껴

귀신조차 보았을까?

눈알 빠진 생선 대가리 굴리며

발정의 교신음 부끄럼 없이 쏘아 올리는

너는 


묻지 마라.

대문 밖에 내다 버린 오장육부는 

누구 것이냐고.

부글거리는 오장육부를 내다버리고

소증 나는 속은 무엇으로 채웠느냐고.


너는 묻지 말고

또한 답하지 마라.

도적질과 비럭질 중에 무엇이 더 견딜만한 지

간음과 매음 중에 무엇이 덜 슬픈지.


너는 답하지 말고 

긴 꼬리를 곧추세우며

‘야옹’

이 밤에 불현듯 불려 갈 어느 영혼을 향해

농담 같은 인사나 건네 다오.


불화와 불안을 지키고 선 대문 앞에서 

바스락 소리마저 불길한 

도둑고양이 

도도한 유연함으로 몸을 돌린다.    







A4 



*A4 한 장으로 요약해 제출하시오


A4 한 장이면 충분하다.

살인을 교사할 수도 있고

국가를 전복할 수도 있고

종말을 예언할 수도 있다.


A4에서는 바다 냄새가 난다.

차고-,  깊고-,  망망한-,

가로 210, 세로 297 밀리미터

그 속에 들어앉은 바다에서

태양은 출몰하지 않으니

거기 새긴 글자들은 

태초 보다 외롭고 전설보다 위태롭다.


언젠가 나는 

A4 한 장 짜리 사표를 쓰고

A4 한 장 짜리 유서도 쓸 것이다.

사망진단서도 A4 한 장이겠지.


A4 한 장에서 출렁이는 바다와 

A4 한 장으로 요약될 모든 사실과

A4 밖으로 밀려난 포말 같은 사연과  

A4에서 불어오는 짜고 비린 인연과  

거기 진을 친 글자들의 합종연횡


A4 앞에서 나는 바다 멀미를 한다.

얹혀 있던 외국어를 게워내고 

곰삭은 모국어를 게워내고

위액처럼 맑은 옹알이까지 게워내며

A4 앞에서 나는 

창백하게 요약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수줍어 수줍게 봄날이 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