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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십이월 May 26. 2022

수줍어 수줍게 봄날이 갔다  

문학소녀라는 먹잇감


수줍어 수줍게 봄날이 갔다  

'문학소녀'라는 먹잇감




시를 처음 써본 것은 국민학교 2학년 때였고, 3학년 때 교내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다.  요즘 아이들은 유치원에 가기도 전에 한글을 떼지만 그 당시에는 중산층 아이들조차 대부분 학교에 입학해 한글을 배웠다.

그러니까 나는 한글을 읽고 쓰기 시작한 것과 거의 동시에 시를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누구에게 배운 바도 없고 무엇을 읽은 것도 아니고 그냥 저절로 썼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반백 년의 세월 동안, 중간중간 10여 년씩 안 쓰고 못 쓴 세월도 있지만 나는 ‘시 쓰는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시를 쓴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왜 그랬을까?


 솜씨가 있었고 내향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늘 문학소녀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다.

문학소녀는 또래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에게도 수시로 공격당하는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선생님들은 종종 손으로 상장을 건네며 입으로는 조롱의 말을 내뱉기도 했다.

시는 산업화 시대에 어긋나는 비효율이고  점잔 빼는 전근대의 꽃놀이였으며, 문학소녀는 손발 오글거리는 자의식 과잉의 센티멘털과 동의어였고 전통적인 현모양처상에 어울리지 않는 청승 바가지였기 때문이다.

재능을 인정해 주는 듯 하지만 실은 누구든 쉽게 비웃고 희롱하고 희화하고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그 이른 봄날 아침 병실에서, 이름도 모르는 간호사가 내가 읽고 있는 시집을 넘겨다 봤을 때 나는 지레 움츠러들었다. 그 간호사는  여중 여고 시절 교과서 밑에 깔아 놓고 읽던 시집이나 소설을 빼앗아 들고 잔뜩 과장된 목소리로 한 대목을 읽어 내려가며 낄낄거렸던 급우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삐뚤어진 남성성을 철저히 내면화한 목소리 걸걸한 여학생의 희롱에 시달리던 기억을. 


아마도 희롱당한 것은 시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빨리빨리’라는 시대정신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들, ‘KS’ 마크 같은 획일성에서 한 치라도 벗어난 그 무엇이든 가차 없이 공격당하던 시절이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라도 모든 예술은 선망과 경외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터부와 멸시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그러한 사연으로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못하고 꽁꽁 싸매 놨던 나의 시  

어쩌면 유치하거나 감상적이거나 혹은 불온하기까지 한 나의 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내 평생의 숙제이고 내외해야 할  손님이고

그리고 매일 밤 새롭게 설레는 나의 연인이었다.  








목련 지는 밤



여위고 키 큰 여자 

창 밖에 서있습니다.

화장하는 손놀림을 무심히 들여다보고

둘러앉은 저녁 밥상도 지긋이 지켜보더니

베개맡에 긴 그림자 하나 걸쳐두고서

어제인 듯 내일인 듯 밤새 서있습니다.

나는 그 여자에게 

한 번도 문을 열어준 적 없습니다.


겨우내 뭉쳐뒀던 눈송이처럼 

희고 탐스런 욕망들을

저렇게 높직이 매달아 놓고

수줍음도 없이 자랑도 없이 

그 여자 그저 거기 서있습니다.

서늘하고 환한 빛에 잠이 깼지만

나는 그 여자에게 

아무 말도 걸지 않았습니다.


여위고 키 큰 여자

창 밖에 서있습니다. 

찬비 듣는 새벽녘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홀로 서있습니다.

차마 손수건은 건넬 수 없기에  

나는 슬그머니 돌아누웠습니다.


시리고 아린 눈물방울들

두 주먹으로 쓱쓱 털어내며

이제는 다 울고 난 그 여자

그래도 가지 않고 창밖에 서있습니다.


향내도 없이 바람도 없이

그 어느 기척도 없이

나는 또 봄밤만큼 여위고 키가 컸습니다.






아직 아니야



아직 아니야.

바람에 이렇게 모가 나 있잖아.

싸우고 다치고 흉 지면서

봄은 불안하고 부족하게 오고

나는 오늘 온몸 배기도록

모난 바람을 맞으니까

그러니까 아직은 봄이 아니야.


아직 아니야.

햇볕에서 이렇게 풋내가 나잖아.

복닥거리고 아우성치고 드잡이 하면서

봄은 경박하고 방종하게 오고

나는 오늘 풋내 나는 햇볕에

속이 아려오니까

그러니까 아직은 봄이 아니야.


아직 아니야.

흙이 이렇게 움츠리고 있잖아.

망설이고 물러나고 등 떠밀리며

봄은 비겁하고 비굴하게 오고

나는 오늘 발바닥이 뻣뻣해지도록

움츠린 흙을 밟으니까

그러니까 아직은 봄이 아니야.


나의 봄은

좀 더 화사하고

좀 더 따사로워

완벽히 찬란한 그런 봄날은

아직 아니야.


볼이 붉은 처녀는 이미 봄바람 들었는데

저승 꽃 핀 늙은이는 벌써 대문 밖에 나앉았는데

실성한 여인은 맨발로 들판을 내달리는데

오늘 밤 긴 비가 내리는데...


농익은 봄날이 짓무르는 밤

돌아누운 창밖으로 밤새

꽃 지는 소리 들려도  

아직은 봄이 아니야.
 






 春夢



곡우에 비 내리지 않아도

봄꽃은 지고

꽃잎은 가볍고 가벼워

날지도 못하는구나.


미련은 없어라.


한 번도 꿈꿔본 적 없는 것처럼

무리 짓지 않고

무덤도 짓지 않고

사라지는구나.


그 투명한 흩어짐은

날지 못하는 존재의 자유

그 찬란한 소멸은

꿈꾸지 않는 존재의 축복


젊은 목숨 풋내에 들려

눈먼 새 한 마리 밤새

울어도 울어도

봄은 가고


꽃 지는 가지 끝에

잠시 잠깐 앉았다 간

전생에서 풀려나온

실낱같은

바람 한 줄기


후회는 없어라.

스치고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사라지고 잊히지 않는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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