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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십이월 May 18. 2022

詩, Coming Out of the Drawer

-그날 아침의 2분


詩, Coming Out of the Drawer

-그날 아침의 2분





그날, 나는 서울의 작은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암환자들에게 보조치료를 해주는, 흔히 요양병원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조용하고 한가로운 아침이었다. 병실에는 빈자리가 많았고 그나마 몇몇 환자들이 치료를 위해 침상을 비웠기 때문에 병실에는 나 혼자 뿐이었다. 아침 식사도 끝나고 청소원들도 얼추 청소를 끝냈고 교대시간이 한참 지났기 때문에 참새떼처럼 시끄럽던 간호실도 조용했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마도 간부이 듯한 낯익은 간호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자주 봐와서 차트를 확인하지 않아도 서로 얼굴을 알아보고 인사 정도는 나눌 수 있는 사이였다. 20대 후반에서 30대의 미혼이 대부분인 간호사들 사이에서 둥글둥글한 체형과 거침없는 말투가 도드라지는 중년이었다. 


그날 나는 허수경의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허수경 / 문학동네 / 2011년)을 읽고 있었고 베드 테이블 위에 그 책을 무심히 올려놓고서 간호사를 맞았다. 가볍게 안부를 묻고 난 간호사가 테이블 위의 시집을 눈으로 훑으며 제목을 소리 내어 읽었다.

“빌어 먹을 뜨거운 심장!!!”

그뿐, 그뿐이었다. 간호사는 향수 냄새를 부려 놓은 채 들어올 때처럼 웃으면서 목례하고 되돌아 나갔다. 불과 2분 여가 경과했을 뿐이고 그 여자는 시집의 제목을 읽었을 뿐이고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 내가 하려는 일은 그날 아침의 2분에서 시작됐다. 

내가 하려는 말은 차츰 풀어놓을 것이고, 우선 내가 하려는 일을 알려야겠다. 

나는 나의 시들을 커밍아웃시키려 한다. 더불어 '시 쓰는 인간'으로서의 나의 정체성도 커밍아웃할 것이다. 

첫 작품으로 무엇을 꺼내 보일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아래 세 편을 선택했다. 








강이 흐르는 곳은



시원(始原)의 서늘한 농담을 조잘거리며

성마르게 굽이쳐온 물이

순하게 몸 불리며 바다를 예감하는 곳

강이 낮게 흐르는 곳은 어디든 고향이어라.


태양빛이 오만한 명암을 드리우기 전

밀교의 향 연기처럼 은밀한 안개를 피워 올리며

하루치의 슬픔과 불안을 예배하는 곳

강이 숨죽여 흐르는 곳은 어디든 고향이어라.


죄 보다 무겁게 뿌리내린 교각을 따라

낙담한 욕망들이 몸을 던지고

파묻을 수도 불사를 수도 없는 기억이 머리를 푸는 곳

병든 강이 흐르는 곳은 어디든 고향이어라.


문명이 차고 이우는 시대의 밤마다

쥐불 놓는 아이들이 참요를 부르고

불온한 젊은이가 홀로 배를 띄우는 곳

늙은 강이 흐르는 곳은 어디든 고향이어라.


강이 흐르는 곳은,

큰 강이 아프게 흐르는 곳은

뿌리도 없고 날개도 없는 목숨들의

고향이니


잠들지 못하는 조갈의 도시여


고단한 몸부림은 강변에 부려놓고  

강심에 몸을 포개 달을 가슴에 얹으면

임박한 바다

서늘하게 다시 열리는 시원의 설렘으로


서럽게,

서럽게 가라.







그 가을의 전쟁



가을은 국화의 주검을

수습하지 못한 채

퇴각했습니다.


적장이 거두지 않은 수급(首級)들은

발길에 차여

격전지를 벗어났고

첫서리에 전사한 황국(黃菊)의 사체 위에

지난밤 다시

눈이 쌓였습니다.


어여쁜 전사의 시신은 바스러지고

흩어지고

사라지고...

그 가을, 전쟁의 향내는  

대기 깊숙이 퇴적했습니다.


지루한 코감기와 간헐적 기침 끝에  

겨울은 나의 도시를 함락했습니다.

항복한 가로수들이 맨손으로 도열하고  

해(年)를 갈아 치우는 전복(顚覆)의 세밑에는

이국의 등불들이 내걸렸습니다.

온몸으로 눈보라가 지나갔지만

나는 얼어붙을 무엇도 지니지 않았습니다.


또다시

장군 같은 꽃들이 피었다 지고

가고 오는 계절이 진을 치고

투항한 뿌리가 골육을 떨어내도

나는 되도록

피난하지 않고 전향하지 않고

나의 도시에서

깊은 잠을 자렵니다.


전술적 정주(定住)와

전략적 동면으로

세월은 가고

삶은 영위되고

깊은 잠 꿈속에서 바람은

향내를 발굴해냅니다.        







중년의 중력

 

 

상달도 그믐께는

죽은 자들이 산 사람 곁에

슬그머니 와 서는 계절.

사나흘 전 이미 첫눈을 맞닥뜨린

은행잎 하나

제풀에 툭 떨어지며

노란 곁눈질로 훑어보는 세상,

하늘과 땅 사이에 저녁이 머물면

어쩔 수 없다.

사라지는 것들은 장사 지낼 수 없고

사라지는 것들은 서사할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어쩔 수 없이 사라져 버리면

쉬 땅을 딛지 못하는 가느다란 빗줄기

옹졸한 노여움으로 맺혀도 보지만  

그뿐, 그뿐이었다.  

끝나지는 않았어도 돌이킬 수 없다.


이제 가자.

마지막 오만을 끌어 모아

망자의 계절을 건너서

늙은이들이 지신을 밟아둔

그 땅으로  

스미듯 미끄러지듯 들어가자.


밤 깊어 세상은 선뜻 빙점 아래로 내려서고

비의 더딘 하강은 동결을 피하지 못하니

시신처럼 차고 뻣뻣한 진눈깨비

어느 불빛도 위로가 되지 못한다.

돌이킬 수 없어도 끝나지 않았다.


그만 가자.

참회와 회한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불빛들 헤프게 번지는 오래된 동네,

묻어둔 김장이 태평스럽게 익어가고

이불 밑 가장의 밥주발이 신열을 앓는

그곳으로

아린 마늘냄새를 풍기며 섞여 들어가자.


들어가 문단속을 하고

한 번도 떠나본 적 없는 사람처럼

겨울을,

어쩌면 아주 길지도 모를

定住의 계절을 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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