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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십이월 Jun 09. 2022

이토록 비루하고  이토록 우아한

먹고사는 詩


이토록 비루하고

이토록 우아한

먹고사는 詩




그날 아침 병실에 들른 간호사는 내가 읽고 있던 시집을 흘깃 넘겨다 보고 제목을 읽었다. 그냥 덤덤하게 따박따박 읽은 것이 아니라 무언가 과장되게『어 먹을 -가운 심-장!!! 』이라고 읽으면서  혼자 웃었다. 나는 웃지 않는데 저 혼자 웃었다.

나는 마치 누군가 내 밥상을 넘겨다 보며 비웃은 것만 같은 모멸감을 느꼈다.


읽는 것은 먹는 것과 닮아 있다. 무언가를 몸 안에 들인다는 점에서만 닮은 것이 아니다. 그다지 내밀할 필요 없어 보이지만 지극히 사적이고, 일상일 뿐이지만 터무니없이 섬세한 감정의 기복이 잠복해 있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나는 누가 내 밥상을 넘겨다 보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가끔 식당에 가면 나중에 도착한 손님이 남의 밥상을 넘겨 보기도 하는데 예의 없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먹는 행위는 언제나 조금은 비루하고 쓸쓸하다. 좋은 사람들과 환한 장소에 모여 앉아 산해진미를 멋지게 차려 놓고 즐겨도, 가족이 소박한 밥상에 오붓하게 둘러앉아 정담을 나누며 먹어도,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제일 밑바닥에서는 비루함과 쓸쓸함이 스멀거린다.

먹는다는 것은 삶과 죽음의 교차점에서 치르는 의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생명을 포획해 유한한 나의 생명을 부지한다는 면에서 육식과 채식의 차이는 무의미하다. 그래서 현명하고 현명한 잡식동물의 식사도 사자의 식사도 어느 연약한 초식동물의 식사만큼이나 비루한 것이다.  

또한 먹는다는 것은 먹고 산다는 것, 밥벌이의 방증이기에 언제나 조금은 쓸쓸한 앙금을 남긴다. 오늘 하루 나 또는 나의 가족이 감수한 간난과 모멸은 궁극에 이것을 위한 것이었는가. 이것 아닌 다른 무엇을 위한 것이었다면 또 얼마나 참혹하겠는가.

 

이토록 비루하고 쓸쓸한 것이기에 모든 식사는 우아해야 한다. 함부로 넘겨다 보고 농담 따위를 던질 수 없는 우아함, 꼬장꼬장 존엄을 주장하는 늙은 귀부인의 우아함 같은 것이 나의 식탁에 깃들었으면 좋겠다.  

 

    









만찬(晩餐)



배가 고팠어.

끓여 놓은 찌개가 식어버리고

구워 놓은 생선이 뻣뻣해질 무렵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고

느닷없이 배가 고팠어.


촉급한 허기였지.

농밀한 욕망이었지.


라면을 끓였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4분.

뜨겁고 홧홧한 국물 한 모금이

음험한 목구멍을 훑어 내렸어.


라면은 신속하게 허기를 제압하고

치밀하게 미각과 후각을 교란시켰지.

축적의 본능으로 구불거리는 면발

정교하게 배합된 분말 10.5 그램


라면이 가벼워지는 동안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퇴화한 꼬리뼈를 깔고 앉아서

육신은 촉급하게 욕망을 빨아 당기고

투항한 감각기관과 무덤덤한 오장육부가

제각기 무너져 내리는 식곤증으로  


기다림은?

기진했어.

 
 





식탁 위의 패총(貝塚)

 


한 끼 식사로는 터무니없다.


큼직한 그릇에 그득한 조개를 보며

수렵과 채집으로 연명하였다는

그 옛날 인류의 허기를 떠올린다.


허기는 끼니마다 실체를 이루니

모든 食事는 엄중하다.

조갯살이 인류를 먹여 살리는 동안

껍데기만 장사 지낸 무덤에서는

불온한 결핍과 욕망이 자라났으리라.


껍데기에는

어느 늙은 별의 신화가 음각되고  

그 안에 들어앉은 몸뚱이에는

머리도 없고 혀도 없으니

변별되지 않는 한 점 살덩이가

해감으로 지분거린다.


인류는 조개만큼 늙을 수 있을까?

그렇게 노회 한 종족이 되면

버리고 취함에 아무

미련도 남기지 않을 수 있을까?


자그락자그락

엽전 같은 소리를 내며

식탁 위에 조개무지가 쌓인다.

조개껍데기는 더 이상 독해되지 않으니

아리고 배틀한 조갯살을 파먹으며


나는

터무니없이 허기가 진다.







닭의 알



냉장고 속에 줄 맞춰 세워 둔 유정란 한 판

제각기 하나씩 우주를 품고 가지런히 죽어가는 알들


먹어도 될까?

아침 토스트 위에 계란 프라이

동그랗게 맺혀 채 굳지 않은 가능성

날지도 못하는 어미는 아침마다 알 하나씩 밀어내고

가벼워진 몸으로 모이를 쪼았겠지


먹어도 되는 걸까?

점심 라면 속에 골고루 풀린 노른자, 흰자

열아홉 첫 수태의 입덧 같은 비린내

끼니마다 불쑥불쑥 고개를 들이미는 식욕은

목숨이 목숨을 탐하는 요동일 거야.


차라리 먹어 버릴까?

저녁 밥상 위에 돌돌 말린 계란말이

활어처럼 숨차게 펄떡거리는 노란 호흡

태양을 숭배하던 온갖 신화도 퇴화한 비행의 유전자도

거기 말려 있을 거야.


그래, 먹어 버리자.

닭이 낳아놓은 금단의 열매

신앙보다 엄숙한 한 알의 우주를


기도하듯 경건하게 한 알의 우주를 삼키며

목숨이 목숨에게 지은 죄를 사하여 주고

팔딱거리는 내 맥박을 가만히 짚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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