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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십이월 Jun 16. 2022

쉽게 써도 괜찮습니다

누가 불러준 것 같은 시


쉽게 써도 괜찮습니다

누가 불러준 것 같은 시




사람마다 글 쓰는 방식은 다 다르고, 시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내 경우는 다듬고 또 다듬고도 미련을 못 버리고 몇 년을 붙잡고 있다가 개칠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러 맨 처음 그 시구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성격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세상에 내놓지 않고 나 혼자 오래 들여다보면서 생긴 버릇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시를 이렇게 쓰는 건 또 아니다. 어떤 시는 몇 번 손 봐서 끝내기도 하고 어떤 시는 그냥 한 번에 써놓고 다시 건드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한 번에 써 내려간 시들은 대체로 자고 일어난 직후에 쓴 것들이다. 밤잠을 푹 자고 일어나서가 아니라, 예를 들어 병실에서 밤을 홀랑 새우고 아침 녘에 잠깐 불안하고도 혼곤한 가수면 상태에 빠졌을 때.

그럴 때 가끔 누가 불러주는 것처럼 머릿속에 시가 떠오른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중요한 시구 정도는 아주 정확히 완성된 형태로 불러준다.

이렇게 쓴 시들은 아무리 다듬고 싶어도 내 능력으로 어찌 건드려 볼 수 없다. 그래서 이 시들은 내게도 두고두고 낯설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쓴 글에는 종종 시마(詩魔)가 등장한다. 아무개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기량을 뛰어넘는 기막힌 시들을 줄줄 쏟아냈는데, 그게 시마(詩魔)의 힘이었고 시마가 떠난 뒤에는 다시는 시를 쓰지 못했다는 얘기들이다.

사전에서 시마(詩魔)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시를 지을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불가사의한 힘'이라고 나온다. 어떤 초월적 존재의 힘에 의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시를 쓰게 다면 그 존재는 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텐데 마귀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평균을 월등히 상회하는 직관이나 감수성을 마귀의 장난으로 보았던 모양이다. 어쩌면 천재성에 대한 질투도 기저에 깔려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보다는 이성의 견제를 받지 않고 지나치게 튀어 오르는 자유로운 감성을 경계하는 유학자의 균형감각이  작용했을 것 같다.


시마(詩魔)는 아마도 인간 무의식일 것이며, 어떤 계기로 무의식이 각성되어 시로 표현된 것을 시마(詩魔)의 개입이라고  했을 것이다.  내가 가끔 누가 불러준 것 같은 시를 쓰는 것 역시 무의식의 각성 덕분일지 모른다.  

나의 시마(詩魔)는 그다지 힘이 세지 않은지 늘 아주 평범하고 소소한 시구를 불러준다. 쉽게 쓴 시가 평범하고 소소하기까지 하니 처음에는 그냥 버릴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다시 꺼내 읽으면 내가 쓴 것 같지 않게 낯선 그 시들이 공들여 쓴 시들 보다 훨씬 따뜻하다는 것을 알게 되곤 한다.


따뜻해서 버리지 못했던 소품들 몇 편을 소개하며, 내 안의 사랑스러운 마귀에게도 인사를 전한다. 그동안 고마웠다고.       


    






사연



그대,

평안하신가요?

저는 평안합니다.


명랑한 햇빛, 태평스런 구름과 속없는 바람

뒷짐 지고 선 큰 산기슭에서

사연 있는 듯 한 연기 한 줄기 피어오릅니다.

세상에 사연 없는 연기가 어디 있겠어요?

제각기 기막힌 사연 하나씩은 지펴내야  

저렇게 가벼웁게 날아오를 수 있겠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로 해 지는 저녁

세상 뒤집어질 봉수의 연기는 아니지만

누군가 한 사람의 속 정도는

새까맣게 태웠을 연기 한 줄기

망설이듯 서성이다 사라집니다.   

어느 못난 가슴이 피워 올린 조난신호입니다.


인연이 닿지 않은 사람들은 총총히 길을 건너고

해독되지 못한 신호들이 재로 풀썩거려

옹졸한 기관지는 밭은기침을 뱉어냅니다.


해 지고 바람은 구름을 몰아가고

해를 삼킨 서산이 밤새 신열을 앓아도

나는 이제 되도록

아무 사연도 지피지 않으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로 비 내리는 밤

그대와 내가 엮은 인연은

성긴 올 풀어져 흙으로 스미도록

오래오래 비를 맞습니다.


부디 그대의 사연도 젖은 낙엽처럼

평안하세요.  


 





마흔의 당신에게



서랍을 열었다 그냥 닫습니다.

상자를 열었다 그냥 닫습니다.

열었다 그냥 닫습니다.

파묻을 수도 불사를 수도 없어서

차마 들출 수도 없어서  

쌓인 먼지 그냥 두고 닫습니다.


고운 먼지 내려앉아도 괜찮습니다.

고와서 괜찮습니다.


돌아보지 마세요.

함부로 돌아봤다 허방을 디딘 이가

어디 그들뿐이겠어요?

노을이 황홀해도,

하루를 다 게워내도록 황홀해도

첫 별이 떨면 떠오를 때까지

돌아보면 안 됩니다.


不惑의 다리를 딛고 無感의 내일로

지금은 건너가야 할 때.


서랍을 밀어 넣고

상자 뚜껑을 눌러 닫고

먼지 곱게 잠들도록

조심조심 살펴 가세요.

오늘의 우연에 발을 맞추며

발자국도 없이 가세요.


돌아보지 않아도 때가 되면 돌아오리니

오늘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돌아보지 말고 가세요.

 






多福



가끔은 그런 날이 있어.

늘 찌푸리고 있던 일상이

내게 눈웃음치는

제법 교태를 부리며 눈웃음을 치는

그런 날이 있어.

그런 날엔 볕이 좋지.

그런 날엔 좋은 볕에 널어 말린 이불을 덮고

초야처럼 수줍게 밤을 맞기도 해.


가끔은 그런 날이 있어.

늘 덤덤하던 일상에게

추파를 던져보고 싶은

슬며시 옆구리를 찌르며 추파를 던져보고 싶은

그런 날이 있기도 해.

그런 날엔 노을이 좋지.

그런 날엔 좋은 노을에 물든 베개를 베고

마지막처럼 나를 위해 울어보기도 해.


가끔이지만, 아주 가끔이지만

그런 날엔 다음 생을 생각해 보기도 해.

다시 나서 살아볼 만도 하겠구나 -

여기까지가 이승의 내 복(福)인가 봐.

이만하면 多福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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