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십이월 Jun 23. 2022

처연하게, 혹은 섹시하게

시가 아름다워지는 순간


처연하게, 혹은 섹시하게

시가 아름다워지는 순간




다시 그날 아침으로 돌아가 보자. 그날 내가 읽고 있던 시집의 제목은『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이었다. 

만약 이런 제목이 아니라 좀 더 점잖고 좀 더 그럴듯한 제목이었다면 어땠을까? 예를 들어 허수경 시인의 저작 중에서도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니』 등. 혹은 이성복 시인의 『래여애반다라』같이 무슨 뜻인지 모를 한자어였다면. 

그랬다면 그 간호사는 그렇게 웃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신 오!, 아! 등의 감탄사를 흘리면서 돌아섰을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이라는 시구는 그다지 시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시적'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정서나 사상 따위를 운율을 지닌 함축적인 언어로 표현한'이라고 나온다. 

이 시구는 쉼표까지 포함해 운율이 살아 있고, 인간성 상실이라는 현상과 이에 대한 화자의 격한 감정까지를 단 아홉 글자로 압축해서 표현하고 있다. 지극히 시적이다.   


시적인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이 시구처럼 거친 표현, 평범한 단어, 밋밋한 비유를 사용해 예쁘거나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아름답다. 

내 마음에 내 생각에 운율이 실리려면 그만큼 절절해야 하고, 함축을 위해서는 버리고 또 비워서 벼려야 하기 때문이다.

아름답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아무나 느낄 수 없고 누구나 똑같이 느끼는 것도 아니다. 아름다운 것과 예쁜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것과 멋지고 화려한 것을 갈라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아름다움을 수용하고 공명하는 정서도 사람마다 다르다.


내 경우는 슬픔과 긴장이 스며 있는 아름다움에 가장 깊이 반응한다. 

벼려낸 칼 끝 같은 언어가 운과 율을 타고 움직일 때, 그것은 처연한 우아함이나 관능적인 긴장감으로 나를 매혹시킨다. 

시가 아름다워지는 순간이다.   

  







구미호



내 꼬리는 아홉

훔쳐보지 마

치마폭에 감춰둔

꼬리 아홉 개


순한 웃음 선한 눈물

걸음 더딘 여인으로는

차마 못 갈 길

아주 못 갈 길

금수의 꼬리를 흔들어

흔들어서


재주 한 번 넘으면

앙큼한 처녀가 되어

달뜨는 밤마다

네 간 하나 빼먹고

내 간 하나 내주지


재주 두 번 넘으면

표독스런 요녀가 되어

천둥 치는 밤마다

네 간 하나 빼먹고

내 간 하나 녹아내리지


재주 세 번 넘으면

그악스런 여편네가 되어

바람 부는 밤마다

네 간 하나 빼먹고

내 간 하나 타들어가지


재주 네 번 넘으면

노회한 할멈이 되어

칠흑 같은 밤마다

네 간 하나 빼먹고

내 간 하나 오그라들지


어지러워

재주 다섯 번은 너무 어지러워

날마다 새로 돋는 둔갑의 간장은

너무 붉어 서러우니


아홉 꼬리 차례로 밟고 넘어지면

누가 뜨끈한 간 빼들고 와

나를 일으켜줄까







들꽃



산에 들에 지천으로 피었어.

길가에 공터에 흐드러지게 피었어.

바람이 불면 바람 타고

춤을 추더군. 훠이훠이


어여쁜 꽃송이들 똑똑 분질러 목걸이를 엮었어.

꽃 같은 기다림을 엮었어.  

들꽃 목걸이 휘감아 목매다는 저녁

모가지 길게 늘인 그림자를 끌고

춤을 췄어. 허위허위 춤을 췄어.


어여쁜 꽃가지들  툭툭 꺾어서 팔찌를 엮었어.

꽃 같은 언약을 엮었어.  

들꽃 팔찌 휘둘러 손목 긋는 저녁

피 칠갑 한 노을을 등에 지고서    

춤을 췄어. 허위허위 춤을 췄어.


돌보지 않아도 지천으로 핀 꽃

가꾸지 않아도 흐드러지게 핀 꽃

흙은 가난해도 황홀하게 향기로워

뿌리는 구차해도 처연하게 아름다워


마지막 한 송이는 머리에 꽂았어.

사무치는 아름다움을 꽂았어.


들꽃 한 송이 정수리에 뿌리내리는 달밤  

춤을 췄어. 허위허위  춤을 췄어.

다시는 피지 말라고, 다시는 나지 말라고
 






순대

 


순대 한 접시 드릴까요?

길고 굽이진 창자

피 버무려 꾹꾹 눌러 채운 찰진 사연

그 곡진한 사연 한 토막 어슷어슷 썰어드릴까요?


순대만 드릴까요, 간도 드릴까요?

평생 노심초사했을 간장

칼날 아래서 자꾸만 부서지는 퍽퍽한 하소연

다 녹아내리고도 남은 그 하소연 몇 점 얹어 드릴까요?  


간만 드릴까요, 염통도 드릴까요?

한 때는 두방망이질 쳤을 심장

다독이며 다독이며 지켜온 비릿한 사랑

그 순정한 이야기도 몇 점 차곡차곡 썰어 드릴까요?


염통만 드릴까요, 허파도 드릴까요?

찬바람 더운 바람 교대로 드나들던 허파

밤마다 꿈으로 이울었을 허파 속 바람들

그 푸석한 추억도 몇 점 얄팍하게 저며 드릴까요?


오소리감투는 어떠세요?

세상사 독한 신산(辛酸) 두루 담아두던 위장

저 혼자 다스리고 삭혀 내느라 주름 잡힌 위장의 속내

그 깊은 속내도 몇 점 맛보실래요?


소증 나는 초저녁 날도 궂은데

무럭무럭 더운 김 오르는

순대 한 접시 드시고 가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쉽게 써도 괜찮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