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날 아침으로 돌아가 보자. 그날 내가 읽고 있던 시집의 제목은『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이었다.
만약 이런 제목이 아니라 좀 더 점잖고 좀 더 그럴듯한 제목이었다면 어땠을까? 예를 들어 허수경 시인의 저작 중에서도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니』 등. 혹은 이성복 시인의 『래여애반다라』같이 무슨 뜻인지 모를 한자어였다면.
그랬다면 그 간호사는 그렇게 웃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신 오!, 아! 등의 감탄사를 흘리면서 돌아섰을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이라는 시구는 그다지 시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시적'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정서나 사상 따위를 운율을 지닌 함축적인 언어로 표현한'이라고 나온다.
이 시구는 쉼표까지 포함해 운율이 살아 있고, 인간성 상실이라는 현상과 이에 대한 화자의 격한 감정까지를 단 아홉 글자로 압축해서 표현하고 있다. 지극히 시적이다.
시적인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이 시구처럼 거친 표현, 평범한 단어, 밋밋한 비유를 사용해 예쁘거나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아름답다.
내 마음에 내 생각에 운율이 실리려면 그만큼 절절해야 하고, 함축을 위해서는 버리고 또 비워서 벼려야 하기 때문이다.
아름답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아무나 느낄 수 없고 누구나 똑같이 느끼는 것도 아니다. 아름다운 것과 예쁜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것과 멋지고 화려한 것을 갈라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아름다움을 수용하고 공명하는 정서도 사람마다 다르다.
내 경우는 슬픔과 긴장이 스며 있는 아름다움에 가장 깊이 반응한다.
벼려낸 칼 끝 같은 언어가 운과 율을 타고 움직일 때, 그것은 처연한 우아함이나 관능적인 긴장감으로 나를 매혹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