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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십이월 Jun 30. 2022

가믈(玄)한 여성성의 아름다움

여류 시일까요?

가믈(玄)한 여성성의 아름다움

여류 시일까요?




부득부득 직업 앞자리에 성별을 붙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남자는 말고 여자에게만. 여직원, 여사원, 여선생, 여의사, 여판사, 여사장 등등. 도장 찍듯 쾅쾅 '여'라는 글자를 앞에 붙여 겸상할 수는 없다는 남자들의 의지를 관철시키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예술가에게는 특별히 '여류'라는 말이 쓰인다. '여류'는 직업인의 성별을 구별할 뿐 아니라 그가 생산해낸 작품조차도 따로 떼어 범주화시키려는 수식어로 들린다.  

그런데 언론이나 대중이 생각 없이 부를 뿐 아니라 여성 예술인 스스로도 단체명이나 전시회명 등에 여전히 여류라는 말을 쓰고 있는 데는 따로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것은 아마도 남성 예술인이 범접할 수 없는 여성만의 예술 세계가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 같다. 


여성성의 본질은 생명을 낳고 기르는 데 있고, 잘 낳고 잘 기르기 위해 필요한 성품이나 능력이 모두 여성성으로 갈고 닦인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현빈(玄牝)'이라는 말이 나온다. 해석을 보탤 수준은 못 되니 나는 이 말 그대로를 여성성의 본질이라고 하고 싶다.  

이렇게 가믈(玄)한 여성성이 예술로 발현되기 위해서는 다시 여성적 아름다움이 되어야 한다. 지난주 발행 글에서 나는 슬픔과 긴장이 서려 있는 처연하거나 관능적인 아름다움에 공명한다고 했었다.  

예를 들어 성숙한 젊은 여성의 몸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생명을 낳고 기를 준비가 되어 있음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것이 곧 관능적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생명을 품고 지켜내는 것이 언제나 순탄하지만은 않기 때문에 생명력 넘치는 아름다움의 반대편에는 애달피 슬픈 상실과 상처가 자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처연한 아름다움이다. 


가믈한 여성성에 맞닿아있는 여성적 아름다움을 표현해낸 작품이라면 그것이 어떤 성별의 작가가 창작했든 그것은 여류일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작품이라면 아무리 여성 작가가 여성에 대해 썼더라도 여류가 못 될 것이다. 굳이 여류 작가를 성별에서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여류에 가 닿으려고 애써본 작품 몇 편을 골라 봤다.


  







春子



내 이름은 춘자.

봄에 태어났냐고?

아니야. 엄동에 났어.


우리 집 무녀리는 봄에 태어나 춘자가 됐어.

지천으로 꽃피는 음력 3월.

3월에 난 춘자는 삼칠일을 못 넘겼어.

아비는 일이 바빠 사망신고를 못 했지.


둘째 딸은 가을에 태어나 슬그머니 춘자가 됐어.

산이고 들이고 온통 그들먹한 음력 8월.

8월에 난 춘자는 돌을 못 넘겼어.

아비는 화가 나서 출생신고도 사망신고도 안 했지.


셋째 딸년은 겨울에 태어나 어거지로 춘자가 됐어.

윗목 물 대접이 꽝꽝 어는 동짓달.

동짓달에 난 춘자는 여직 살아 있어.

아비는 남부끄러워 출생신고 따위는 하지 않았지.


내 이름은 춘자.

꽃 피는 춘삼월에 태어났냐고?

아니야. 서리 내리는 동짓달에 났어.


봄마다 봄에 난 춘자가

산으로 들로 나를 끌어내.

살고 싶다고, 살고 싶은 봄날인데

못 살겠다고, 못 살겠는데 봄날은 청명하다고,

춘자가 나를 끌고 하루 종일 쏘다녀.


가을이면 가을에 난 춘자가

문 밖에서 자꾸만 울어.

죽고 싶다고, 죽고 싶은 가을밤인데

못 죽겠다고, 못 죽겠는데 달은 휘영하다고,

춘자가 나를 불러내 달 보고 울어.


겨울이면 겨울에 난 춘자가

홀로 짐을 싸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데, 날은 밝아와

가야 한다고, 가야 하는데 눈은 소록하다고

춘자가 혼자서 눈길 앞에 섰어.
 






콩쥐

 


너도 잔치에 참석하라고

고운 새 신 신고 꼭 참석하라고

세상은 무심한 아비처럼 내게 말했어.

나무 호미는 진작 부러졌고

황소는 멀찍이서 풀만 뜯었지.

돌밭에 기우는 해는 그래도 어여뻤어.


베 한 필을 다 짜고 나면

너도 잔치에 갈 수 있다고

세상은 의붓어미처럼 내게 말했어.

손 설은 베틀은 굼뜨기만 하고

선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지.

달강거리는 베틀 소리는 그래도 정다웠어.


곡식 석 섬을 다 찧어 놓고

너도 잔치에 오지, 왜 안 왔냐고

세상은 의붓 언니처럼 내게 말했어.

찧어도 찧어도 낱알은 줄지 않고

새떼는 몰려와 양식만 축냈지.

뽀얀 알곡 더미는 그래도 뿌듯했어.


아비 탓이 아니야.

의붓어미 탓도, 의붓언니 탓도 아니야.

어여쁘게 볼 붉히는 순정 탓이었지.

달강달강 가슴 뛰는 조바심 탓이었지.

때늦어 돋아나는 뽀얀 사랑니 탓이었지.  


잔치가 무르익는 깊은 밤

밑 빠진 독에 물 길어 부으며

첨벙첨벙 물장난에 날이 새도록

두꺼비는 흉측하게 훔쳐만 봤어.


속없이 첨벙거린 신명 탓이 아니야.

동이마다 담겨오던 반달 탓도 아니야.

세상처럼 흉측하게 훔쳐보던 

옴두꺼비, 네 탓이었지.







어머니



어머니,

우는 아이와 

울지 않는 아이와 

울지 못하는 아이

그 모든 아이들의 꽃밭에 

물을 주세요. 

아이들의 꽃밭에 

예기치 않던 풀 한 포기 돋아나면

어머니는 조금만 우세요.


어머니, 

바람이 잦아드네요. 

아침이 오려나 봐요.

아이들의 꽃밭에 해가 비치면

낯선 나라 병정의 창검같이 

파랗게 날 선 풀 한 포기 

깨어나겠지요. 


어머니,

아픈 아이와 

이제 곧 아플 아이와 

이미 다 아프고 난 아이

그 모든 아이들의 숟가락에 

비릿한 생선살 한 점씩 올려주세요.

아이들의 밥그릇이 다 비고 나면

어머니는 정한 물 한 대접 떠다 

물 말아 드세요. 


어머니,

바람이 다시 일어나네요. 

비를 부르는 바람이에요.

아이들의 꽃밭에 비가 오려나 봐요.

그 비가 개고 나면 

가뭇없는 구름

그리웁겠지요.


별 같은 아이는 사막으로 가고 

달 같은 아이는 산으로 가고 

꽃 같은 아이는 숨어 버렸어요. 

어머니, 

떠나간 아이들의 베갯잇에 

희고 가벼운 구름 한 조각씩 수놓아주세요.

그 구름이 아이들의 이마를 덮어주면

어머니는 편히 주무세요.


당신 마당의 그 깊은 바람

당신 마당의 그 무거운 구름은

툇마루에 앉혀두고

어머니는 곤히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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