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불화(不和)
옹졸한 불화의 시(詩)
시론집『불화하는 말들』에서 이성복 시인은 말했다.
'……
우리가 할 일은
자기와 불화하고, 세상과 불화하고
오직 시 하고만 화해하는 거예요.
그것이 우리를 헐벗게 하고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을 안겨다 줄 거예요.'
*『불화하는 말들』 이성복 / 문학과 지성사 / 2015년
나도 시대와 불화하고 세상과 불화하고 나 자신과 불화하는 시를 쓰고 싶었다. 심장을 벨 듯 새파랗게 날 선 시, 불붙은 장작더미 위로 걸어 올라가는 마녀의 서늘한 맨발 같은 시, 시대의 산발한 머리끄덩이를 낚아채 질질 끌고 갈 광기의 시. 그런 시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한 불화는 타협과 절충의 삶을 위로해 준 판타지였고, 나와 불화한 것은 오직 나의 시였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날 아침 내 병실을 방문했던 간호사는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다. 그는 오랜 세월 몸에 익은대로 감정노동을 했을 뿐이고, 내가 읽고 있는 시집을 비웃을 의도 같은 것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축 늘어진 암병원 병동의 공기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 보려 조금 무리했을 수는 있지만 그게 그다지 예의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몇 밀리미터의 오차로 삐걱거리는 문처럼 살짝 아귀가 안 맞았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 나는 그날 아침의 2분여를 끊임없이 반추했다.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이런 것이리라. 이런 까칠한 성정, 세상 질긴 뒤끝!
불화해야 할 대상과 제대로 불화하지 못했기에 애꿎은 상대에게 꽁해서 두고두고 그 자디잔 일을 되새김질하고 있는 것이다. 옹졸한 성정은 절절하지도 고뇌에 차지도 않은 옹졸한 불화의 시을 낳을 뿐이다.
그리고 그 옹졸한 시와 불화하며, 다시 세상과 불화하고 나 자신과 불화했다 착각하며 살아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겹겹이 옷 껴입은 나는 타협과 절충의 유독한 침전물에 병들고, 나의 시는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을 안겨주지 못 하나 보다.
금줄
-나 임신했어.
아내가 말했다.
고마웠다.
살을 섞는 육신과 육신
그 살가운 거리만큼
아득하게 고마웠다.
소리가 그려 보여준 한 점
혈육이구나, 한 점 혈육이구나.
기뻤다.
내리고 내림받은 피
그 피의 점도만큼
마음 놓고 끈적거렸다.
내 하루의 비굴과 구차를 주렁주렁 매달아
금줄을 쳐야겠다.
내 삶에 그럴듯한 알리바이가 생겼다.
미안하다.
나고 낳고 또한 소멸하는
존재와 존재의 무게만큼
이제 나는
네 앞에서만 부끄러우면 되는구나.
지하철
나도 한 때는 지하철을 탔어.
거기 문가에 서서 작용과 반작용에 저항했지.
익숙한 소음 속에서 안내방송을 가려듣고
가끔은 노선도를 올려다보며
가야 할 역을 헤아려 보기도 했어.
길을 잃었어.
미궁 같은 지하에서 길을 잃었어.
생경한 방언의 소음만 가득할 뿐
여기엔 내가 습득한 언어가 없어.
사람들은 예언을 믿는 걸까?
묵묵히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머리 위로
계시처럼 은유로 가득 찬 소리가 울려 퍼져.
종말을 알리는 굉음이 부득부득 다가오는데...
길을 잃었어.
미궁 같은 지하에서 길을 잃었어.
해독할 수 없는 기호와 비밀을 싸매 둔 지도뿐
여기엔 내가 동의한 약속이 없어.
사람들은 전설을 믿는 걸까?
음산한 상징들이 꿈틀거리는 바닥을 딛고
망설임 없이 한 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어.
저들은 내게 없는 비표를 품고 있지.
나도 한 때는 지하철을 탔어.
예언을 믿고 전설을 해독하고 비표를 품고 있었지.
나도 한 때는 가야 할 곳이 있었어.
토크 쇼
연예인 K 씨는
엊저녁 TV에 나와 비열을 팔았다.
그저께 저녁에는 무식을 팔았고,
그 그저께 저녁에는 몰염치를 팔았다.
중년의 K 씨가 TV 속에서 웃는다.
오늘은 또 무얼 팔려나.
밥상 앞에서 아비가 웃는다.
철없는 아들도 따라 웃는다.
맛난 것 없는 밥상.
아비는 오늘 하루 무엇을 팔아
이 밥상을 차렸을까.
곰삭은 젓갈처럼 짜고 콤콤한
K 씨의 웃음을 찍어 먹다가
사레들린 아비가 기침을 한다.
웃음에 대해 알만큼은 안다고
간 고등어 퀭한 눈이 속삭인다.
기침 끝에 눈물 맺힌 아비의 눈
식은 밥 한 덩이처럼 밍밍하게
목메어 오던 오늘 하루,
아비가 받아온 봉급은
절반이 굴욕의 대가인 것을
알아야 할 사람은 모두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