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에서 런던으로
다니엘이 회사를 운영하며 살고 있는 곳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였다. 하지만 다니엘은 서울에서 런던을 거쳐 하이델베르크로 가는 비행기 표를 샀다. 하이델베르크의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에 있는 저택(Villa)에 살고 있는 87세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런던에서의 기업 합병이라는 중대한 회의 일정이 있었기에, 그는 영국을 경유하여 하이델베르크로 향하는 여정을 택했다.
서울에서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의 비즈니스 클래스는 거의 비어 있었다.
자리에 앉아 비행기가 이륙하자 다니엘은 어릴 적 어머니와의 추억들로 마음이 시려 왔다. 그리워하는 어머니를 사실 자신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어머니는 누구인가… 어머니는 어떤 어린 시절을 어디서 보내셨고, 무슨 이유로 독일까지 와서 나를 낳으셨을까….’ 사실 이런 것을 깊이 생각할 시간도 갖지 못하고 매일매일 바쁘게 살아온 자신의 삶이 낯설게 다가왔다.
이때 좌석 옆을 지나가는 승무원에게 다니엘은 손을 들며 말했다.
"Excuse me, if it’s not too much trouble, could I have a glass of whisky, please? No rush at all." (실례합니다, 번거롭지 않으시다면 위스키 한 잔 부탁드려도 될까요? 전혀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니엘의 이 예의 바른 영어 표현에 승무원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 네. 잠시만 기다리시면 곧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승무원은 곧바로 위스키 한 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와서 테이블에 놓으며 말했다. “불편하시거나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그녀는 친절하게 웃으며 돌아갔다.
어떤 나이건, 어떤 국적이건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끄는 다니엘의 품위와 이국적인 외모는 전 세계 남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유전자 속에 존재하는 비밀 코드처럼, 모든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동양의 사색적인 면모와 서양의 감각적인 윤곽을 동시에 지닌 다니엘의 밝은 표정 속에는, 채워지지 않는 인생의 어느 조각 그늘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다정한 한마디를 건넨다면 그 그늘이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유발하는 깊은 눈빛이었다.
보는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마법 같은 유전자가 깃든 예술 작품이 존재한다면, 다니엘은 마치 그런 작품처럼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묘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친절하시군요.” 다니엘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식도와 위를 달구는 액체를 느끼며 조금 긴장을 풀었다. 인사동에서 만난 유리코와 그림들, 그리고 어머니가 만든 조각상들의 연관 관계를 이해해 보려 했지만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만약 어머니가 독일로 오기 전에 딸을 하나 낳고 입양 보냈다면, 유리코는 어머니의 손녀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지나칠 정도였던 어머니가 제 딸을 입양 보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대체 어떤 상황이었는지 그는 알고 싶었다.
다니엘의 어머니 미희가 독일에 온 것은 1950년대였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었지만, 한국전쟁 때 한국을 떠나오셨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다니엘은 1970년에 태어났다. 조각가로 활동하려던 어머니는 다니엘을 서른아홉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출산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예술가로서의 활동은 그때 막을 내린다. 다니엘이 어머니에게 삶의 전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그 당시 아버지 한스가 본격적으로 할아버지 요한의 화학 공장을 인수하며 세계적인 회사로 성장시키고 있었기에, 어머니는 다니엘을 키우며 남편을 내조하는 일에 전념해 왔다.
다니엘이 서너 살 되었을 무렵, 어머니는 다시 조각을 시작하셨다. 경쟁이 치열한 유럽 예술 시장이 아닌 고국에서 전시를 해보시려고 가끔 다니엘을 데리고 인사동의 작은 전시장을 찾아다니시곤 했다. 하지만 예술 활동은 이미 전성기를 지난 상태였고, 인사동 화랑에서의 전시는 어머니에게 향수에 젖은 고향 나들이 같은 의미가 되어버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깼을 때는 의자가 편안히 침대처럼 뒤로 눕혀져 있었고 담요가 덮여 있었다. 의자를 바로 세우고 모니터를 켜서 위치를 확인했다. 중동 지역 위를 날고 있었다. 세 시간 정도 지나면 런던에 도착할 터였다. 서른대로 보이는 우아한 승무원이 다니엘에게 다가오며 미소 지었다.
“깊이 주무셔서 깨우지 않았습니다. 식사하시겠습니까?”
"Excuse me, it seems I’ve slept through the meal. Would it be possible to get a glass of tomato juice? Also, if you have any Schwarz Vollbrot with cheese available, I’d very much appreciate it." (실례합니다, 자느라 식사를 놓친 모양입니다. 토마토 주스 한 잔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리고 혹시 치즈를 얹은 슈바르츠 폴브로트가 있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승무원은 웃으며 독일어로 화답했다. “독일 분이시군요. 저도 어머니가 독일 분이라 항상 슈바르츠브로트(Schwarzbrot)에 치즈를 간식으로 먹었습니다.” 그녀는 유창한 독일어로 말하고는 다니엘의 얼굴을 유심히 보며 웃었다.
“아… 다니엘 폰 클릿칭(Daniel von Klitzing) 씨군요. 독일 화학 회사 클릿칭의 CEO이시네요. 신문 기사에 나온 사진보다 훨씬 더 미남이십니다.”
마치 최면에 걸린 듯 승무원은 다니엘의 이국적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꿀색이 도는 갈색의 큰 눈, 흰머리가 섞인 검은 머리, 발달한 턱선과 그리스 조각 같은 코와 입. 라틴계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구릿빛 피부와 동양인의 단정하고 모던한 근육질 몸매는 세상의 모든 우월한 유전자를 다 가진 것처럼 보였다.
스페인 마요르카에 별장을 둔 다니엘은 틈이 날 때마다 그곳에서 업무를 보았기에 피부가 라틴계처럼 검게 그을려 있었다. 마흔대 후반인 다니엘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품위를 지녔으며, 마요르카에서 즐긴 수영 덕에 탄탄한 어깨와 팔 근육을 자랑했다.
승무원이 갤리(부엌)에서 독일 검은 빵 샌드위치와 토마토 주스, 물 한 잔을 가지고 왔다. “토마토 주스가 진해서 물도 한 잔 가져왔어요. 너무 진하면 섞어 드세요.”
다니엘이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 친절하시군요. 감사합니다.”
천천히 빵을 먹고 주스를 마시며 창밖을 보고 있을 때, 승무원이 음식을 치우러 왔다. “제 이름은 안나(Anna)입니다. 비행 중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안나는 수줍은 듯 식기를 치우며 말했다. 다니엘에게는 세상의 모든 여자가 그를 아버지처럼, 연인처럼, 혹은 오빠나 동생처럼 느낄 수 있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안나가 식기를 치우며 느낀 것은 그가 풍기는 신비로운 향취였다. 아랍어로 ‘환대’를 뜻하는 크리드 마잘리스(Majalis)의 향기가 그의 주변을 안개처럼 감싸고 있었다. 대추야자의 달콤함과 쌉싸름한 차 향이 섞인 그 냄새는, 다니엘이라는 존재 자체를 닿을 수 없는 먼 이국(異國)의 성소처럼 보이게 했다
두바이 여행이 잦았던 아버지 한스는 아들에게 늘 이 향수를 선물했다. 마잘리스는 크리드 하우스 내에서도 일반 매장에서는 찾기 힘든‘익스클루시브(Exclusive)’ 라인의 정점에 있는 향수다.
마잘리스(Majalis)는 아랍어로‘모임’이나‘응접실’을 뜻하며, 중동의 귀한 환대 문화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조향사 올리비에 크리드가 중동 왕실의 모임에서 피우던 향료와 대추야자, 차(Tea)의 향기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한정적인 유통 경로를 가진 귀한 모델이기에 한스는 두바이에서 이 향수를 발견할 때마다 아들을 위해 사 오곤 했다.
생각 없이 쓰는 물건, 생각 없이 하는 말과 행동, 습관처럼 먹는 음식들…. 그런 사소한 일상들이 결국 그 사람을 정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니엘의 이런 면모는 어떤 국적이나 나이의 여자라도 꿈속으로 빨려 들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의 따뜻한 미소는 모든 인종에게 환상의 세계를 여는 문과 같았다.
스쳐 지나가듯 만났지만 평생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겪는 외로움과 삶의 무게를 단번에 이해하고 안식을 줄 것만 같은 사람. 눈빛과 손짓 하나로 마음을 안정시키는, 마치 내 삶에 항상 존재했던 것 같은 사람이 바로 다니엘이었다.
다니엘은 거대 화학 회사의 사장이지만 싱글이자 혼혈이며,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자신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독일 조부모 손에 컸다. 이런 배경이 그를 인간적으로 만들었고, 가슴 한복판에 품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여성들로 하여금 그를 보호해주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보호받고 싶게 만들었다.
긴 여행이 잦은 다니엘은 항상 종이 책을 읽었다. 전자책이 흔한 시대였지만, 그는 인쇄된 활자 속에 자신의 영혼이 들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종이 책을 고집했다. 그 안에서 그는 평안을 얻고 어머니를 느꼈으며 정체성을 찾았다. 경제, 철학, 과학, 소설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다.
그의 어머니 역시 늘 책을 가까이했다.
독일어보다는 모국어인 한국어와 일본어로 된 책을 주로 읽으셨는데, 구하기 힘든 그 책들을 아버지 한스가 늘 수소문해다 주곤 했다. 강원도 원산이 고향이었던 어머니는 어린 시절 집안에서 두 언어를 모두 사용했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출산 직후 생모를 잃어 얼굴조차 모르지만, 외할머니가 일본 여자였고 책 상인의 딸이라 늘 책을 좋아하셨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다니엘은 자신의 책 집착이 일본 책 장수였던 외가 조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생각하곤 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당시 대한민국의 중요한 귀족으로서 통치 세력과 협력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너무나 똑똑하고 훌륭한 분이셨단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정말 복잡했지. 만약 제국에 동조하지 않으셨다면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그 좋아하시던 학문에 전념할 기회조차 없으셨을 거야. 할아버지는 정치보다 학문을 사랑하셨고, 서양 문화와 일본과의 교류 없이는 나라가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알고 계셨어. 하지만 일본은 교류가 아닌 무력으로 들어왔고, 야망에 눈먼 군사 정권이 한반도와 중국을 거쳐 유럽까지 가려던 폭력의 시대였단다. 인간의 파괴적인 생각은 아시아뿐 아니라 유럽의 2차 대전으로도 이어졌고, 그 후 한국은 이념이 충돌하는 전쟁을 겪었지….”
어머니는 할아버지를 정치보다 학문을 사랑했던 나약한 거인으로 기억했다. 폭력의 시대에 지식을 지키기 위해 제국과 타협해야 했던 그 비겁하고도 숭고했던 선택들. 다니엘은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그 복잡한 혈통의 무게를 활자 속에서 찬찬히 되새겼다
자신의 유전자 절반을 차지하는 두 나라의 근대사를 슬프게 설명하며 회상에 잠기던 어머니. 다니엘이 책 속으로, 또 한편으로는 유리코와 어머니의 조각상 사이로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는 동안, 비행기는 천천히 런던 착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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